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전개와 반동적 본질
서론
20세기 후반부터 대두된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은 자본주의 경제정책의 주류로 채택되며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이론은 1970년대 말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과 1974~75년 경제공황을 겪으며, 그 원인을 국가의 지나친 개입에서 찾고자 하는 흐름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케인즈주의적 '조절적 자본주의'의 실패를 빌미로 시장만능주의와 작은 정부를 내세우며,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엄격한 통화관리, 균형재정, 규제완화 등을 통해 사적 기업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면 인플레이션, 실업, 공황 등의 모순을 해소하고 경제의 성장과 안정을 실현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겉보기에는 경제 효율성과 활력을 제고하려는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그 본질은 세계화된 시장경쟁과 금융 자유화를 통하여 독점대자본이 노동대중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고 자기 축적을 극대화하려는 원리에 다름 아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이론적 기초와 주요 학파
신자유주의 이론의 등장 배경과 이론적 기초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때 지배적이었던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국가개입적 경제관이 1970년대에 들어와 한계에 부딪친 상황에서 대두되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침체가 공존하는 침체성 인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겪었고, 1974~1975년에는 전후 최대 규모의 세계공황을 맞았다. 이러한 위기를 계기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 간섭정책(큰 정부)이 오히려 경제 불안정의 원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자유시장 원리에 맡겨야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의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이 하나의 세계적 부르주아 경제이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사회주의 진영의 위력이 약화된 냉전 종반기에, 서방 자본세력은 전세계에 대한 경제지배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완전한 시장 자유화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본격화하였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는 19세기 고전적 자유방임주의(레이세 페어)의 현대적 부활이라 할 수 있다. 자유시장 경쟁을 통해서만 자원 배분의 효율성이 극대화되고 경제가 자동 안정화된다는 고전파의 신념을 계승하면서, 20세기 중후반의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 일부 이론적 절충을 시도한 것이 현대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토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와 시장만능주의를 강조하며, 사유재산권과 기업 이윤을 절대시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정부의 적극적 경기조정 정책은 오히려 시장 기능을 왜곡하여 장기적으로 성장과 안정을 해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정부의 역할은 통화 공급 조절 등 최소한에 그치고 나머지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1980년대 이후 미국 레이건 행정부와 영국 대처 정부의 정책 이념으로 채택되어, 대규모 감세와 탈규제, 민영화와 복지축소 등의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정책 패러다임으로서 전세계에 확산되었다.
정광수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현대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은 내부적으로 몇 가지 학파 또는 분파로 구성된다. 대표적으로 진화론적 신자유주의, 통화론적 신자유주의, 헌법적 신자유주의의 세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학파는 강조점과 접근법에 차이가 있지만, 모두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을 비판하면서 자유시장과 개인의 선택을 옹호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주요 학파와 그 대표 인물들의 이론을 살펴본다.
진화론적 신자유주의: 하이예크 등 오스트리아 학파
진화론적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 사상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 두드러진 흐름으로, 하이예크(F. A. Hayek)와 오스트리아 학파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하이예크는 1940년대 후반 몬페를랭 소사이어티를 주도하며 전후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저서 《노예의 길》 등을 통해 국가계획경제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는 시장 질서를 인간 사회의 자생적 진화 산물로 보아, 인위적 개입 없이 진화적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이예크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는 정부의 경제간섭을 전체주의로 가는 길에 비유하며 경고하였다.
하이예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적 공헌은 신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그들은 시장가격이 분산된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신호 메커니즘이므로, 정부가 이를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제도와 규범도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인간이 설계한 계획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자생적 질서론을 펼쳤다. 이러한 진화론적 관점은 후일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여, 시장에 대한 맹신과 국가 개입에 대한 근본적 불신으로 이어졌다. 즉, 진화론적 신자유주의는 “적자생존의 시장”만이 효율과 성장을 담보한다는 논리로,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정책마저 시장 왜곡으로 간주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하이예크와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러한 주장은 현대 신자유주의 이론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의 부활”로 불리게 되었다. 하이예크, 루트비히 폰 미제스 등은 모두 케인즈주의를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을 옹호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이념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통화론적 신자유주의: 시카고 학파와 프리드먼
통화론적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 이론 중 통화주의(monetarism) 계열로, 1970년대 경제위기 국면에서 부상한 시카고 학파의 이론이다. 대표자는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으로, 프리드먼은 하이예크와 함께 현대 신자유주의 이론을 대표하는 거두로 꼽힌다. 프리드먼은 저서 《자유기업과 자유》(1962), 《통화정책의 역할》(1968) 등을 통해 케인즈주의 총수요관리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통화량 관리에 입각한 거시경제 안정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핵심 주장은 “통화는 경제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으로, 통화공급의 변동이 경제순환과 물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므로 정부는 통화량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리드먼은 특히 중앙은행의 통화증발이나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가 인플레이션의 주원인이라고 보고, 통화공급량을 매년 일정한 증가율로만 늘리는 규칙(rule)에 따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통화량 중시론은 1979년 영국 대처 정부와 미국 연준의 정책에 반영되어, 통화긴축을 통한 물가안정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통화론적 신자유주의자들은 경기변동과 경제위기의 원인을 통화관리의 실패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1970년대 나타난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해 “통화공급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물가 상승과 경기침체가 동반되었다”고 해석하고, 적절한 통화정책만 있으면 공황도 극복 가능하다는 낙관론을 폈다. 그러나 정광수 박사는 이러한 견해가 경제공황의 근본원인을 왜곡하고, 마치 통화량 조절만으로 공황을 없앨 수 있는 듯한 환상을 조장하는 반동적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소유형태 간의 모순(과잉생산과 유효수요 부족)이지, 통화량 부족이 아니다. 그럼에도 통화주의자들은 표면적 현상인 인플레이션과 통화지표에만 집착하여, 자본주의 내재 모순을 은폐하는 어용 이론을 만들어낸 셈이다. 예컨대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에 대해 “은행의 과도한 통화공급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정부의 잘못된 통화정책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의 사회경제적 뿌리는 군비지출 등 제국주의 국가의 반인민적 정책에 있으며, 단순히 통화량을 조절한다고 근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통화론적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원인을 통화관리의 기술적 문제로 격하시키고, 근본 모순을 가리는 기만성을 드러낸다.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실업문제에 대해서도 독특한 주장을 폈다. 그는 완전한 자유시장 노동에서는 실업이 자발적 선택의 결과이며, 정부나 노동조합의 개입 때문에 자연스러운 실업률보다 실업이 늘어난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은 이른바 '자연실업률 가설'을 제기하여, 어떤 정책을 써도 장기적으로 실업률은 노동시장의 균형 수준(자연실업률)으로 회귀하므로, 정부의 실업대책은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높은 실업의 책임을 실업자와 노동조합에 전가하고, 국가의 실업부조나 복지정책을 축소하는 이론적 근거로 악용되었다. 정광수 박사는 프리드먼의 이러한 실업관을 두고 “실업 발생과 증가의 원인을 가리우기 위한 반동적 궤변”이라고 규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 증가는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강화와 기술도입으로 인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 등의 구조적 원인에 기인하며, 실업의 책임이 노동자의 '게으름'이나 정부보조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문제를 단순화하여 시장에 맡길 것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인 실업자의 생존권 요구를 비난하고 복지지출 삭감의 논리로 악용된 측면이 강하다.
헌법적 신자유주의: 공공선택학파와 부캐넌
헌법적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 이론 중 공공선택학파(Public Choice)의 이론을 토대로 한 분파이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은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뷰캐넌(James M. Buchanan)으로, 198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뷰캐넌은 프리드먼, 하이예크와 함께 현대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3대 대표자로 꼽히며, 정부 개입을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의 문제로 분석한 독특한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케인즈 이론과 전후 자본주의의 '복지국가'적 개입정책을 비판하면서, 시장실패뿐 아니라 정부실패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뷰캐넌은 정치 영역을 경제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는 공공선택이론을 창시하였다. 공공선택론은 선거, 입법, 예산편성 등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정부 행위를 미시경제학의 방법론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로서, 정치인과 관료를 자기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제인으로 가정하고 이들의 행동을 분석한다. 그 결론은 정부 개입이 정치적 유인 구조 때문에 비효율과 부패를 초래하며, 큰 정부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다. 뷰캐넌은 이러한 공공선택론의 연장선에서, 정부 실패를 막고 자유시장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으로 '헌법경제학'을 제창하였다.
헌법경제학은 말 그대로 입헌적 제약을 통해 정부의 역할을 제한하자는 이론이다. 뷰캐넌은 정부의 재량적 정책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헌법 규칙으로 정부의 재정지출, 과세, 통화발행 등을 엄격히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정부가 법으로 균형재정 원칙을 지키도록 하고, 함부로 적자재정을 할 수 없게 만들자는 것이다. 또한 중앙은행의 독립, 금본위제 부활 등도 헌법적으로 규정하여 정치권력이 인위적으로 경제를 조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뷰캐넌은 이를 통해 “자본주의 고유의 자유경쟁 질서를 확립하고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광수 박사는 뷰캐넌의 헌법경제학을 가리켜, 자본주의 사회제도의 본질과 위기 원인을 왜곡하고 독점자본에 유리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려는 반동적 학설이라고 평한다. 뷰캐넌의 이론은 표면상 합법적 절차와 규범을 중시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경제위기의 책임을 정치권과 정부 개입에 전가함으로써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은폐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공공선택론은 정부복지 지출을 이해관계 집단의 로비 산물로 폄하하고, 실업보험이나 사회보장도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본다. 이러한 시각은 복지축소와 노동조합 약화 등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영미권을 중심으로 정부의 역할을 법적으로 제한하고 재정긴축을 헌법적 의무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EU의 마스트리히트 조약 또한 회원국들의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조항을 두어,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긴축을 헌법적 틀에서 강제하였다.
헌법적 신자유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자본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여, 민주적 여론이나 선거를 통해서도 쉽게 변경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자유방임주의에 입각한 사회의 기본규칙”을 헌법에 못박아 두려는 시도로서,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정책(누진과세, 복지확대 등)이 입법되지 못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뷰캐넌이 말하는 “헌법적 계약”은 사실상 자본과 국민 간의 사회계약이 아니라,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시하는 반민중적 계약이라 할 수 있다. 정광수 박사는 뷰캐넌의 헌법경제학이 등장한 배경에 1970년대 케인즈주의의 이론적 파탄이 있다고 지적한다. 즉, 기존 케인즈식 개입정책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자본주의를 구원할 처방이 마땅치 않게 되자, “지적인 파탄” 상태에 빠진 부르주아 경제학계가 새로운 돌파구로 내놓은 것이 공공선택론과 헌법경제학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경제학은 국가개입을 줄이는 형식만 제시했을 뿐, 자본주의 위기의 실질적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다. 그 한계가 명백해지자,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은 1980년대 이후 현실에서는 금융자본에 대한 국가의 은밀한 지원과 개입을 지속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는 모순적 행태를 보이게 되었다.
결국 헌법적 신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축소와 헌법적 제한을 통하여 시장원리의 절대화를 추구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정부의 권한과 기능을 헌법으로 축소하여야 경제가 산다”는 신념에 입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민중과 정부에 떠넘기는 변호론적 성격을 띤다. 이러한 이론은 복지국가의 성과를 “사회주의적 침해”로 매도하며, 자본의 자유를 헌법으로 신성불가침화하려는 반동적 기획이라고 정광수 박사는 비판한다. 요컨대, 공공선택학파와 뷰캐넌의 헌법경제학으로 대표되는 헌법적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 이론을 정치·법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하여 체제 수호에 활용한 사례로서,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의 반동성과 기만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변종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개와 세계적 확산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의 신자유주의화 시작 (1970년대~1980년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하 신자유주의화)은 1970년대 후반부터 먼저 영미권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1979년 집권한 대처 정부가 케인즈주의를 폐기하고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대처 정부는 통화공급 목표제를 도입하여 고강도 긴축통화정책을 실시하고, 대대적인 민영화와 노동조합 탄압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은 1980~81년 심각한 불황을 겪었으나, 물가상승률을 크게 낮추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통화긴축의 부작용이 컸기에 영국은 1986년 이후 정책기조를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1980년 당선된 레이건 대통령이 “정부가 문제가 아니라 해답”이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감세와 규제완화를 추진하였다. 레이건 행정부는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공급중시 정책을 펼쳐, 최고소득세율과 법인세율을 과감히 인하하는 한편 산업 전반의 각종 규제를 철폐하였다. 또한 통화긴축과 재정지출 삭감을 통해 인플레이션 억제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초반 미국도 심각한 경기후퇴를 겪었지만, 1983년 이후 쌍둥이 적자(재정적자+무역적자)를 대가로 일시적 경기회복을 이루었다. 레이건의 감세 정책은 래퍼곡선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세입감소로 재정적자가 폭증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는 과도한 감세가 자동적으로 경제성장을 일으켜 세수가 늘어난다는 주장이 허황되었음을 증명한 사례였다.
이처럼 영국과 미국에서 추진된 신자유주의화는 노동시장 유연화, 복지 축소, 규제완화, 민영화 등의 정책으로 구현되었다. 두 나라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혼재된 초기 경험은 이후 다른 나라들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선진 자본주의국가 내에서는 각국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신자유주의화의 속도와 양상이 달랐으나, 전반적으로 1980년대에 들어 신자유주의 정책이 주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아갔다.
라틴아메리카: 구조조정과 잃어버린 10년
신자유주의 정책은 곧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 등의 주도로 발전도상국에 전파되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가장 먼저 수용한 지역 중 하나였다. 원래 1960~70년대의 중남미 국가들은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을 취하여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에 달했고, 1인당 국민소득도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세계적 공황과 교역 악화로 수입대체 전략이 난관에 부딪히자, 일부 국가에서 극우 정권이 들어서며 자유시장 지향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칠레(1973)와 아르헨티나(1976~83)로, 이들 국가는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교육받은 경제관료들(일명 시카고 보이즈)을 앞세워 무역·금융의 급격한 자유화를 단행했다. 그러나 준비 없이 시장을 개방한 결과, 국내에는 투기적 거품이 일고 해외로부터 값싼 수입품이 범람하여 산업기반이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규제완화로 통화·금융 당국의 통제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투기 열풍이 불었고, 결국 금융제도가 붕괴하고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초기 실험국이었던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이런 부작용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들어 멕시코, 볼리비아를 시작으로 베네수엘라, 페루, 브라질 등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차례로 IMF가 권고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였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주로 외채위기를 계기로 도입되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의 금리인상(볼커 쇼크)으로 외채 부담이 폭증하자, 채무불이행 위기에 몰린 중남미 국가들은 IMF의 구제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IMF는 지원 조건으로 수입대체 전략의 포기를 강요하면서, 보호관세 철폐와 수입자유화 등 무역 개방, 그리고 재정 긴축을 요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공공지출 중 교육·보건 등 사회복지 지출의 대폭 삭감이 우선 시행되었다. 학교와 병원 예산이 줄면서 서민층에 대한 기본 서비스가 약화되었다. 또한 환율의 대폭 평가절하가 단행되어 수출을 늘리려 하였고, 그 결과 물가가 폭등하여 민생고를 가중시켰다. IMF는 나아가 금융시장 개방과 자본 자유화를 요구하여, 외국인 투자자본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했다. 은행 규제가 풀리고 외환시장이 개방되자, 투기자본의 급격한 이동으로 금융 불안정성이 한층 높아졌다. 실제로 멕시코는 1990년대 중반 다시 한번 심각한 외환·금융위기를 겪었다.
또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다. 신자유주의 이론은 국영기업을 비효율의 온상으로 간주하고 민영화를 통한 효율성 증대를 주장하였는데, 이에 따라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전력, 통신, 석유, 교통, 항만 등 기간산업 분야의 국영기업들이 헐값에 민간에 매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등 공공복지 부문도 시장에 맡겨져 사유화되었다. 그 결과 전화요금, 전기료, 교통료 등 생활 필수 서비스 요금이 큰 폭으로 인상되어 서민 부담이 증가했다. 국영기업 매각을 통해 자본가들은 새로운 이윤 원천을 획득하였으나, 공공성보다는 수익성이 우선되면서 사회 전체 후생은 악화되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 라틴아메리카 경제는 1980년대 내내 침체 또는 마이너스 성장에 시달렸다. 경제성장률은 1970년대에 비해 급격히 떨어졌고, 실업률은 오히려 증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취업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대폭 하락하여 생활수준이 후퇴하였다. 빈곤인구가 급증하고 소득 분배는 극도로 악화되어, 부유층과 빈곤층 간 격차가 미국·영국보다도 더 심각해졌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 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졌으며,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다수 국가에서 10년 내내 마이너스 성장 또는 정체를 기록하여, 1980년대는 라틴아메리카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같은 기간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한 쿠바는 1981~1991년 동안 오히려 33.5%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다른 나라들과 뚜렷이 대비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 처방이 결코 보편적 발전모델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경제의 토대를 훼손시키는 파국적 결과를 초래했음을 방증한다.
아프리카: IMF의 구조조정 강요와 경제 파탄
아프리카 지역도 1980년대에 IMF와 세계은행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대규모로 받아들였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오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20세기 중엽 독립을 이룩하였으나, 식민 지배기의 종속적 경제구조와 과중한 외채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아프리카 정부들은 자립적 발전전략을 추구하며 국가주도의 산업화와 지역협력을 도모했지만, 경제 침체가 지속되자 이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다. 이 틈을 파고들어 IMF와 세계은행은 “아프리카가 살 길은 농업 중심의 수출지향 전략뿐”이라 회유·압박하며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당시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들은 재정위기와 채무상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IMF의 구조조정 지원금을 받아들이면서 경제 주권을 IMF·세계은행에 넘기다시피 하였다.
IMF가 아프리카에 시행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와 유사하게 무역 자유화, 공공부문 축소, 평가절하, 보조금 삭감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 우선 각국에 보호무역 조치를 철폐하도록 강요하여, 허약한 국내산업이 국제 경쟁에 노출되었다. 그 결과 이제 막 성장하려던 아프리카의 제조업, 영세공업 부문은 값싼 외국 상품의 홍수에 압도되어 붕괴되었다. 대신 세계은행이 권장한 1차산품 수출 위주 경제로 재편되면서, 많은 나라들이 식량작물 대신 커피, 땅콩 등 수출작물 재배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는 식민지 시대의 단일작물 경제로 회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아프리카 경제를 다시금 세계 시장 가격 변동에 취약한 구조로 만들었다. 예컨대 르완다는 국민 식량보다 커피 재배에 치중하게 되었고, 세네갈은 주곡 대신 땅콩을 재배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그 결과 각국 경제는 세계 곡물시장과 선진국 농산물 수요에 좌우되는 예속적 체제로 전락하였다.
또한 IMF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대적인 평가절하(통화가치 하락)를 실시하도록 했다.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면 수출상품의 국제 가격경쟁력이 일시적으로 높아져 수출이 늘어날 수 있다. 실제로 가나의 경우 통화절하 후 코코아 수출이 증가하여 무역수지가 약간 개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평가절하의 부작용이 훨씬 컸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자국 통화 가치 하락은 수입물가 폭등으로 이어져 국민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주었다. 르완다의 사례를 보면, 생활필수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던 르완다는 통화절하 이후 생필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주민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게다가 공공지출 축소와 보조금 철폐로 사회서비스가 붕괴하면서 경제·사회적 충격은 배가되었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정부의 의료, 교육 부문 지출이 1970년대에 비해 절반 이상 삭감되었으며, 그나마 존재하던 사회보장제도도 사라졌다. 예컨대 소말리아의 경우 1980년대 말 정부의 의료예산이 1970년대 중반보다 75%나 감소하였다. 그 결과 예방접종이나 보건 서비스 부족으로 각지에서 콜레라가 창궐하고 에이즈가 급속히 확산되는 등 공중보건 위기가 초래되었다. 교육예산 삭감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문맹률이 상승하였다. 주민들의 삶은 지옥으로 변하였으며, 독립 후 어렵사리 쌓아온 자립발전의 꿈이 IMF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선진국 채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부채 문제를 해당 국가 국민들의 희생으로 떠넘긴 사례였다. 두 지역 국가들은 외채위기를 해결하고 경제발전을 이루고자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였지만, 그 결과 구조조정 지원금 명목으로 오히려 외채가 더 늘어나고 국민소득의 큰 몫이 채무상환으로 빠져나갔다. 전체 채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경제주권을 IMF와 미국 등 채권국에 사실상 예속당하는 현대판 식민지 처지로 전락하였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제시한 세계화 시대 발전모델이 실은 제국주의적 수탈 모델에 다름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폐해가 누적되자, 199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각지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과 재조정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번 훼손된 경제기반을 복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외채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버블 붕괴와 신자유주의화 (1980년대~90년대)
일본은 1980년대 후반까지는 유럽식 복지국가와는 다른 유형의 자본주의 모델(기업별 노사협조, 장기고용, 관치경제 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경제성장이 저성장국면에 접어들고, 1970년대부터 누적된 재정적자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일본도 점차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게 되었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공황을 거치며 일본 정부의 재정수지는 큰 폭의 적자로 전환되었고, 1975년 이후 국채발행을 통해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채가 쌓였다. 이에 1980년대 초중반 일본 정부는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몇 년간 정부지출을 동결하는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실시하였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 몇 년 동안 일본의 세출 예산은 전년도와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억제되었다. 다만 이런 와중에도 방위비는 늘어나 1980년 대비 1988년에 군사비 지출이 66%나 증가하였다. 이는 영미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신보수주의적 군사전략과 맥을 같이 했음을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이제 국제사회에 공헌할 때”라며 군사대국화를 추구했고,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복지지출을 억제한 것이다. 1989년에는 처음으로 소비세(부가가치세)를 도입하여 부족 재정을 메우고자 했다. 소비세 도입과 함께 소득세율 인하가 이루어져 직접세 비중은 낮추고 간접세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세제가 개편되었는데, 이는 저소득층의 세 부담을 상대적으로 늘리고 고소득층에 유리한 조치였다.
1980년대 후반 일본 경제는 거품자산 가격 상승으로 일견 호황을 구가했으나,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와 함께 심각한 장기침체에 빠졌다. 이 시기 일본은 내부적으로는 자본 축적의 둔화, 외부적으로는 미국 등으로부터의 시장개방 압력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신자유주의화를 가속화하였다. 우선 일본 정부는 성장둔화 하에서 노동비용 절감을 통한 기업 수익 확보를 도모하며 각종 노동규제 완화 정책을 추진했다. 1980년대 내내 이어진 정부지출 억제 기조와 더불어, 작은 정부 지향의 구조개혁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신자유주의화는 또한 대외적 압력에 의해 촉진된 측면이 크다. 미국은 1980년대 내내 일본을 상대로 무역적자 문제를 제기하며, 일본 시장의 추가 개방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예를 들어 일본 내 대형 소매유통망의 출점을 제한하던 대규모소매점포법을 미국이 철폐하라고 압박했고, 결국 일본은 이 법을 완화하여 외국계 대형유통 업체들의 진출과 수입상품 증가를 허용했다. 이는 일본이 미국 요구로 유통시장 규제완화를 실시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의 자동차·반도체 협상 등에서 일본이 일정 비율의 시장을 외국 상품에 내줄 것을 강요하여, 일본은 반도체 시장의 20%를 외국 제품이 점유하도록 하겠다는 합의까지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본은 점차 국내시장의 개방화를 수용하게 되었다.
금융부문의 개방도 크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1980년대 이래 일본에 대해 “금융·자본시장을 완전히 개방하라”고 요구했고, 일본은 이에 따라 금융시장 자유화를 단행하였다. 특히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화 가치의 대폭 상승(엔고)을 용인함으로써, 일본의 금융시장은 사실상 국제 투기자본에 개방되었다. 플라자 합의 이전 1달러당 240엔 수준이던 환율은 1986년에 160엔 수준까지 엔화 가치가 급등했다. 이는 미국이 달러 약세를 유도하여 대일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고, 일본은 결과적으로 엔고로 인한 수출 감소와 내수 부양을 위해 금리를 인하하면서 부동산·주식 거품을 키우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의 거품경제는 이러한 국제적 요인과 맞물려 형성된 것이며, 1990년대 초 거품 붕괴는 일본 경제를 한층 취약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일본에서의 신자유주의화는 내부 요인(재정위기, 저성장)과 외부 요인(미국의 개방압력)이 겹쳐 비교적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은 영미보다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이 늦었음에도, 1990년대 초까지 재빨리 규제완화·시장개방·긴축재정 등을 실시하여 다른 선진국들에 못지않게 철저한 신자유주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그 특징은 단기간에 급격한 경제의 세계화와 금융자유화가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후과로 일본 경제는 장기불황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 1990년대 내내 일본은 사실상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경기부양을 위해 초저금리와 양적완화까지 동원했지만 경제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오히려 대기업들은 사상 최고 이익을 올리는 반면 중소기업들은 도산하거나 영업부진을 겪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지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서유럽: 복지국가의 후퇴와 통합 과정의 신자유주의화
서유럽 국가들도 1990년대를 전후하여 광범위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였다. 다만 각국의 발전 수준과 정치·계급관계에 따라 도입 시기와 정도는 상이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1980년대 초에는 사회당 정부가 집권하여 일시적으로 국가개입을 확대하려 했으나, 1983년 이른바 “U턴”으로 불리는 긴축정책 전환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1990년대 들어 우파 정권 하에서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데, 특히 공공부문 개혁이 두드러졌다. 이는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예정된 유럽통화동맹(EMU)에 대비한 조치이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는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복지비 지출을 삭감하고 국유기업을 민영화하는 등의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노동자들의 임금과 사회복지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98년 기준 프랑스 전인구의 12.4%에 해당하는 300만 명 이상이 실업 상태였고, 그 중 37%는 1년 이상 장기실업자였다. 실업자들의 거의 절반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며, 많은 복지급여가 대폭 삭감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으로 인한 고용 불안과 사회안전망 약화의 단적인 사례이다.
스웨덴은 북유럽 복지국가 중 비교적 일찍 신자유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나라였다. 1980년대 초 이미 우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스웨덴 화폐의 평가절하와 임금억제 등 긴축정책이 실시되었다. 다만 당시 스웨덴은 노조 조직률이 높고 노동계급의 힘이 강력하여, 그 이상의 급격한 정책변화는 어려웠다. 1980년대에 시도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 정도에 그쳤으나, 작업 현장에서는 기업들이 신경영전략을 내세워 작업조직을 보다 유연화하고 시장지향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기업들은 시장환경 변화에 맞춰 생산과정과 노사관계도 유연하게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종래의 노동자 경영참여 모델을 약화시키고 성과주의 경영을 도입했다. 그 결과 현장에서 노동자의 통제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스웨덴 자본가들은 유럽 단일시장 형성으로 경쟁압력이 심해지자, 고임금과 두터운 복지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따라 스웨덴은 시장원리 채택을 통한 구조조정에 나섰고, 재정 긴축, 공공지출 삭감, 감세 등 통화주의적·공급주의적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 결과 스웨덴은 1990년대 후반까지 철저한 신자유주의 구조를 확립하게 되었는데, 이에 비례하여 노동자의 힘은 더욱 약화되고 자본의 통제는 강화되었다.
독일은 전후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로 유명했지만, 1990년대 통일과 함께 세계화의 압력에 직면하여 신자유주의 경향을 보였다. 독일 보수진영은 통일 이후 국가의 복지지출과 높은 조세부담이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킨다며 복지국가 모델을 비판했다. 이들은 “과도하고 소모적인 정부지출이 노동자의 부담을 늘려 노동의욕을 감퇴시키고, 높은 임금과 세금으로 생산비용이 증가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엄격한 노동법과 단체협약 때문에 노동시장이 경직되어 있고, 후한 실업보조금이 노동자의 근로의욕을 해친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논리들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주장의 독일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1990년대 중후반 독일에서도 실업급여와 복지혜택을 대폭 삭감하고, 의료·연금제도의 개악으로 노동자 부담을 늘리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대한 국가 지원도 약화되어 실업자들의 재취업 지원이 축소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모두 국가의 개입을 줄이고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시켜, 기업의 비용을 경감시키려는 의도에서 추진되었다.
한편, 1990년대 유럽은 유럽연합(EU) 통합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1992년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럽통화동맹 참여 조건으로 각국에 재정적자 GDP 대비 3% 이하, 국가채무 60% 이하라는 엄격한 재정기준을 요구하였다. 이는 회원국들이 통화동맹(유로화)을 위해 초긴축정책을 실시하도록 만든 규범이었다. 실제로 각국 정부는 이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복지예산과 공기업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고, 세출을 줄이는 긴축을 단행했다. 1999년 1월 유로화가 도입될 당시, 가입국 중 마스트리히트 기준을 완벽히 충족한 나라는 룩셈부르크 하나뿐이었지만, EU는 예정대로 통화통합을 강행했다. 이는 유럽 각국이 통합을 앞두고 얼마나 가혹한 긴축정책을 실시했는지를 보여준다. EU 통합은 또한 자본이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환경을 조성하여, 유럽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강화로도 이어졌다. 기업들은 임금이 싼 동유럽이나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며 노동력 이동의 자유를 만끽했지만, 이에 대응할 유럽 차원의 노동자 보호는 미흡하여 노동자들의 교섭력은 떨어지고 처우는 악화되었다.
전반적으로 일본과 서유럽에서 실시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국내 경제와 세계경제에 파국적 후과를 미쳤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상승했으며, 노동자들은 생활수준 악화와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1990년대 이후 대기업들은 과거 최고 수준의 이윤을 갱신하고 있지만, 자본금 1,000만 엔 미만의 영세기업들은 경기가 회복되지 못해 고전하고 있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국내 경제와 대기업 사이의 괴리가 심화된 것을 의미하며, 대기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민경제 전체에는 긍정적 파급이 미미하다는 뜻이다. 프랑스에서도 신자유주의 도입 결과 임금과 복지가 위협받고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유럽통합 과정에서 자본의 국경 간 이동이 촉진되자, 자본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이동하여 수익을 극대화했고, 유럽 노동자들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정책은 일본과 유럽 경제를 헤어나오기 어려운 불황의 수렁에 빠뜨렸다는 평가도 있다. 1997~98년 발생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 등 일련의 사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취약성과 반동성을 드러낸 국제적 위기였다. 특히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부분적으로 일본의 버블 붕괴 후유증과 일본 자본의 무분별한 해외진출과도 관련이 있었다. 일본의 장기불황 속에서 일본계 은행들은 동남아시아 시장으로 대거 진출하여 경쟁적으로 대출을 확대했는데, 이러한 자금 중계와 투자는 상당 부분 투기적 성격을 띠었다. 1997년 위기 직전, 인도네시아 외채의 40%, 태국 외채의 54%가 일본계 은행으로부터의 대출이었을 정도로 일본 자본 의존이 컸다. 일본 금융자본의 과잉진출과 거품 형성은 동남아 금융위기의 한 요인이 되었고, 이는 다시 일본 경제에 타격을 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금융화의 결과이지만, 유럽 은행들도 그 충격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유럽경제는 장기간 침체를 겪었다. 이렇듯 신자유주의 정책의 광범한 도입은 세계적으로 잦은 금융불안과 위기를 촉발하였으며, 결국 그 피해는 각국 서민대중에게 돌아갔다.
현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경제사회적 후과
잦아지는 금융위기와 경제 불안정
신자유주의 정책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 중 하나는 금융 불안정의 심화와 주기적 금융위기의 발생이다.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크고 작은 금융위기가 잇달아 발생하였다: 1987년의 블랙먼데이 증시폭락, 1994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과 LTCM 사태, 2000년대 초 IT버블 붕괴, 그리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촉발한 금융세계화와 금융화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통제를 풀어 금융부문의 자유화를 추진했고, 금융거래와 투기자본 이동에 대한 거의 모든 규제를 제거하였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금융시장의 규모와 활동이 실물경제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으며, 금융자본의 투기적 행위가 경제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정광수 박사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금융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가계, 기업, 정부 등 경제의 3대 부문에서 금융이 중심적 역할을 차지하게 되는 경제 구조의 변화. 다시 말해, 이윤 획득과 자본축적이 상품생산이나 서비스 거래 등 실물경제 활동보다 금융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화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지표를 보면, 세계 GDP 대비 금융자산의 규모는 1970년대만 해도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약 4배에 달한다. 2013년 말 기준 전 세계 주식·채권·예금 등 금융자산 총액은 약 2경 8,658조 달러인 반면, 세계 GDP 총합은 7,547조 달러에 불과했다. 또한 1998년 일평균 1.5조 달러였던 외환거래 규모는 2013년 5.3조 달러로 폭증하였다. 연간 세계 무역액이 2013년 18조 달러였으므로, 4일분의 외환거래로 1년치 무역거래를 모두 결제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규모다. 이는 현대 경제에서 투기적 자본 이동이 얼마나 거대해졌는지를 보여준다.
금융부문의 팽창과 탈규제는 초기에는 경기부양과 자산가격 상승을 통해 거품적 호황을 만들어내지만, 그 거품이 꺼질 때마다 대규모 위기를 초래한다. 2008년 발생한 세계금융위기는 그 대표적 사례로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반동성과 취약성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정광수 박사는 2008년 금융위기가 폭발한 근본 원인을 “1980년대 이후 실시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누적된 세계경제의 복합적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2008년 위기는 폭발적인 금융거래로 인한 순수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공황이 겹친 복합위기였다. 1980년대 이후 다국적기업과 거대 금융자본은 전세계적 규모로 자본축적을 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감세와 정부규제 철폐, 사회지출 삭감 등 신자유주의 정책에 편승하여 실물경제 부문에서도 이윤을 추구했다. 그 결과 현실자본 축적과 금융자본 축적이 결합된 이중 구조가 형성되었고, 한계에 달한 두 모순이 2008년에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시대의 세계경제는, 과잉 유동자본에 의한 금융적 축적과 실물경제의 제한된 축적이 결합된 채 누적되다가, 일정 주기에 한 번씩 대규모 위기로 분출하는 불안정한 구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2008년 위기는 특히 미국 달러 기축통화 체제 하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달러화에 기초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파생금융상품과 신용거래가 폭증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카지노 자본주의”가 전개되었다. 미국은 기축통화 발권국으로서 누린 특권을 활용해 대량으로 달러를 풀어 전세계적 투기를 부추겼고, 그 결과 2000년대 중반 미국 내 주택버블이 한계를 맞자 파생상품 부실이 일거에 드러나 금융위기로 번졌다. 동시에 금융부문이 비대해진 경제구조 하에서 실물경제의 유효수요 부족 문제가 심각해져, 부채에 의존한 소비 팽창이 한계에 달하자 실물부문의 공황까지 겹치게 되었다. 이러한 복합위기 앞에서 각국 정부는 유동성 공급과 대대적 구제금융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평소 “작은 정부”를 외치던 신자유주의자들도 위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케인즈주의적 정책을 동원한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 각국은 중앙은행과 재무부를 동원해 금융기관을 구제하고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시행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신자유주의의 종말” 혹은 “케인즈주의의 귀환”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광수 박사는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며, 2008년 위기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누적된 근원적 모순들의 필연적 산물”이자 자본주의 고유의 불치병임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가 약속했던 영구적 성장과 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유형의 금융공황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치명적 모순이 드러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실업과 노동의 불안정, 노동착취 강화
신자유주의 정책의 또 하나의 큰 후과는 전 세계적으로 실업 문제가 악화되고 노동의 불안정성이 증대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이론은 오히려 자연실업 개념을 통해 일정 수준의 실업을 정당화하고 복지축소를 정당화하였다. 실제 정책에 있어서도, 신자유주의화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명분으로 노동자 보호장치를 철폐하여 실업위험을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주로 해고 규제 완화, 비정규직 확대, 고용 형태 다변화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 많은 자본주의국가들에서 사용된 수법은, 정규직 고용을 줄이는 대신 계약직·임시직 등 비정규 노동을 늘리고, 아웃소싱과 파견근로를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기업은 인건비를 가변비용화하여 경기변동 시 손쉽게 해고하거나 임금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고용이 극도로 불안정해지고 평균 임금수준이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노조가 약화된 조건에서 이러한 처지에 몰린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할 방법을 찾기 어려웠고, 비정규·저임금 노동이 구조화되었다. 한편 신자유주의 정책은 노동과정의 유연화도 추진하였다. 기업들은 아웃소싱이나 계약제 도입 등으로 노동과정을 분절화하고, 성과급제 등 임금유연화를 통해 노동강도를 높였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정리해고제, 파견제, 변형근로시간제 등이 도입되어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추진되었고, 연봉제와 성과급제 확산으로 임금체계도 유연화되었다. 이러한 유연화는 겉으로는 생산방식 혁신처럼 포장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노동자를 더욱 쥐어짜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선진국들에서도 “워킹 푸어(working poor)”라 불리는 일하는 빈곤층이 대거 나타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정책하에서 한편에서는 대기업들의 축적이 이루어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저임금 비정규 일자리가 양산되어 근로빈곤층이 구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비율이 급증하고, 2010년대 들어 고용자 수는 증가함에도 가계소비는 정체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늘어난 고용이 질 낮은 일자리일 뿐 아니라, 단시간 노동자가 많아 평균 노동시간이 줄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즉, 고용이 양적으로 증가해도 사회 전체 노동투입량은 크게 변하지 않아, 과거처럼 고용증가가 경기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러한 고용 없는 성장, 불완전 고용 현상은 미국, 유럽 등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정광수 박사는 이를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제회복의 회로가 차단”된 것으로 표현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착취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총수요 부족이 만성화되어 고용증가가 소비증가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노동조합의 세력 약화를 가져왔다. 정부의 친기업적 정책과 글로벌 경쟁 압력 속에서 노조들은 임금인상 억제와 고용유지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었고, 많은 나라에서 노조 조직률이 하락했다. 노조의 교섭력이 약화되자 기업들은 더욱 자유롭게 임금을 통제하고 인력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사례에서 보았듯, 심지어 실업보조금 등 복지제도가 노동자의 “근로의욕을 제거”한다는 신자유주의 담론이 받아들여져, 노조의 사회적 지지를 약화시키는 이데올로기 공세도 있었다. 이는 결국 노동자의 권리 전반을 후퇴시킴으로써, 자본의 이윤 극대화에는 일시적으로 기여했지만 노동자계급의 생활안정과 사회통합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정리하면,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률은 구조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고용되더라도 상당수가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에 매여 경제적 불안 속에 살아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크게 심화시켰다. 노동자 측의 교섭력 약화와 착취 강화는 단기적으로 기업 수익을 높였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소득불균형 확대와 내수 부진을 초래하여 또다른 경제위기의 조건을 형성하였다. 2000년대 중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저소득 노동자층의 주택대출 부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근로빈곤층의 확대가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이렇듯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희생시켜 일시적으로 자본의 이윤을 지탱했지만, 동시에 장기 침체와 위기 요인을 키운 모순적 결과를 낳았다.
사회 양극화와 빈부격차의 심화
신자유주의 정책은 소득 및 부의 분배 구조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전후 혼합경제 체제 하에서 다소 완화되었던 빈부격차가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자본주의국가에서 다시 급격히 벌어졌다. 이는 앞서 논의한 실업과 저임금 노동의 증가와 맞물려 나타난 현상으로, 부유층의 소득과 자산은 크게 늘어나고 중하층은 상대적·절대적 빈곤이 확대되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의 감세정책과 복지축소는 부유층에게 유리하고 빈곤층에게 불리한 재정구조 변화를 가져왔다. 레이건 정부 이래로 시행된 각국의 대규모 감세는 주로 고소득자와 기업에 혜택을 주었고, 재정수지 악화를 초래했다. 감세로 감소된 세수를 보충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간접세 인상 등 중·저소득층에 대한 과세 확대가 뒤따랐다. 이는 세제의 누진성을 약화시켜 조세의 소득재분배 효과를 감소시켰다. 또한 복지지출 삭감은 빈곤층의 생계지원을 줄이고, 사회안전망의 구멍을 크게 벌렸다. 예컨대 영국과 독일 등에서 실업수당 지급기간 단축, 의료·연금 본인부담 증가 등이 시행되어 저소득층의 생활안정이 위협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모두 “부자 감세, 가난한 자 복지삭감”이라는 방향으로 일관하여, 결과적으로 부유층의 우대와 빈곤층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트리클 다운(trickle-down) 효과”, 즉 부자에게 혜택을 주면 그 부가 아래로 흘러내려 모두가 잘산다는 논리는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궤변으로 남았다.
사회 양극화는 노동소득뿐 아니라 자본·금융소득의 편중을 통해서도 심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금융화 현상 속에서, 금융자산을 보유한 상위계층은 투자이익을 크게 늘릴 수 있었지만, 금융자산이 없는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금융세계화는 국가 간 자본 이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부유층 자산가들이 세율이 낮은 해외로 자산을 이전하고 과세를 회피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이는 각국 정부의 부유층에 대한 과세 여력을 약화시켜 부유층 우대 정책을 더욱 부추겼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양극화는 세계적 차원에서도 나타났다. 1980년대 이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소득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부채위기와 구조조정을 겪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1980년대에 실질소득이 감소하거나 정체하였지만, 같은 기간 미국 등 일부 선진국의 1인당 GDP는 꾸준히 상승했다. 세계화의 혜택이 선진 자본과 부유층에 집중되고, 저개발국과 저소득층은 오히려 더욱 빈곤해진 것이다. 물론 1990년대 이후 중국 등 일부 신흥공업국이 급성장하여 세계적 불균형에 다소 변화가 생겼지만, 국내적 불평등은 오히려 그 신흥국들 내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은 “낙수효과”를 통해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는 장밋빛 약속과 달리, 격차 심화와 대중의 상대적 빈곤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정광수 박사는 이를 “부유층의 부활과 부의 집중”이라고 표현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이 부유층을 위한 체제 구축이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에서 대기업은 이윤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데 국민경제는 침체하고, 프랑스에서 실업자는 의료혜택도 못 받는 현실 등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와 권력의 편중이 얼마나 심화되었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불평등의 증대는 사회적 갈등을 격화시키고, 사회통합의 기반을 훼손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1990년대 이후 많은 자본주의국가들에서 범죄율 증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문제가 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초래한 사회적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경제성장률을 제고하거나 전반적 번영을 가져오는 데 실패한 반면, 금융불안정과 실업, 양극화 등 사회경제적 모순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신자유주의가 주장한 바와 정반대로, 시장만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위기 시 막대한 개입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다음 장에서는 신자유주의 이론 및 정책 전반에 내재한 이러한 반동적·기만적 성격을 종합적으로 논의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과 정책의 반동적·기만적 성격
지금까지 살펴본 신자유주의 경제이론과 정책의 전개 및 후과를 종합해볼 때, 신자유주의는 명목상으로는 시장 자유와 효율성을 내세우지만 그 실질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독점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임을 알 수 있다. 정광수 박사의 연구는 신자유주의 이론의 이러한 반동성과 기만성을 조목조목 폭로하고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은 자본주의 모순의 근본원인을 은폐하고 왜곡한다는 점에서 반과학적·반동적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통화론적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공황의 원인을 통화량 공급 부족이나 정책 지연 등 기술적 요인으로 돌렸다. 그러나 실제로 공황의 원인은 생산의 사회화와 자본주의적 소유형태 간의 모순에서 비롯되며, 통화량 조절 따위로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정책당국이 통화지표만 잘 관리하면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퍼뜨렸다. 이는 노동자들과 대중을 기만하여, 위기의 책임을 체제 대신 정책운영 미숙으로 돌리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프리드먼의 자연실업률 이론 역시 실업의 책임을 노동조합이나 실업자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자본주의 제도의 취약성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 정광수 박사는 이러한 이론들을 “날조된 궤변”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둘째, 신자유주의 이론은 스스로 “과학”과 “중립”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변호론에 불과하다. 예컨대 헌법적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뷰캐넌의 헌법경제학은 언뜻 보기에 법치주의와 합리성을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헌법을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최후 보루로 삼아 정부의 개입을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는 독점자본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방해받지 않고 지속하기 위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뷰캐넌은 헌법분석을 통해 여러 규칙들의 기능을 자유방임주의 원리에 맞게 설명하려 시도했는데, 이는 곧 헌법을 이용해 개입주의적 경제정책(복지, 재분배 등)을 원천 차단하자는 뜻이다. 이러한 헌법경제학의 반동적 본질은 “자본주의사회제도의 반동성을 은폐하고 자본가계급에 유리한 위기 극복 방도를 제시할 목적”에서 출현한 학설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요컨대 헌법경제학은 자유와 권리의 수호를 내세우지만, 실제 수호 대상은 자본의 특권과 지배질서인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프리드먼의 “합리적 규칙”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는 정부가 경제활동에 필요한 “합리적인 규칙”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정책을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정광수 박사는 프리드먼이 말하는 규칙이란 “독점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억압·착취하여 더 많은 이윤을 짜내는 데 유리한 규칙”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실제로 프리드먼은 복지제도 축소, 노조의 힘 억제 등을 주장하며 이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복지축소 주장은 결국 독점자본가들의 요구를 대변한 반동적 설교에 지나지 않으며,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기는커녕 악화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하는 “합리성”이란 사실상 자본의 합리성, 이윤논리의 합리화일 뿐이며, 노동자 민중에게는 불합리한 희생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셋째,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중적 잣대와 위선을 드러내며, 위기에 처하면 본색이 폭로되는 기만적 체제이다. 평상시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작은 정부를 신봉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경제위기가 닥치면,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국가들은 오히려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개입에 나선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 당시 미국과 유럽 각국 정부는 경쟁이라도 하듯 수조 달러 규모로 금융기업을 구제하고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손”을 떠받들던 신자유주의가 위기 앞에서 스스로의 교리를 저버리고 케인즈주의적 큰 정부로 탈바꿈한 모순적 장면이었다. 정광수 박사는 이를 두고 “은폐된 형태로 독점자본을 지원하던 신자유주의는 위기에 직면한 순간부터 노골적인 지원을 한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작은 정부란, 사실 위기가 없는 동안에는 복지지출을 줄여 기업부담을 덜어주는 정부이지만, 막상 자본이 위기에 빠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대한 재정지출로 독점자본을 구원하는 “거대정부”로 돌변하는 정부인 셈이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정부지출은 줄지 않고 오히려 위기 시에 폭증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스스로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실패한 이론일 뿐 아니라, 그 이상 자체도 사실은 진심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의 이중성은 IMF 관리 체제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개발도상국들에는 혹독한 긴축과 구조조정을 강요하던 IMF와 미국 등은, 정작 2008년 위기 국면에서는 자국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을 쏟아부었다. “시장은 언제나 옳다”던 신념은 간데없고,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던 이들이 오히려 민간 부실의 국가 인수라는 도덕적 해이에 앞장섰다. 이러한 모습은 신자유주의 담론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넷째, 신자유주의는 반민중적 성격을 가진다. 정광수 박사는 현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철두철미 대독점자본가들의 착취적이고 약탈적인 지배체계”라고 규정한다. 신자유주의 이론은 자유·효율을 말하지만, 그 결과 전세계 노동자 민중의 삶은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사실상 소수 착취계급의 이익만을 위해 다수 근로인민대중의 희생을 합리화하는 반인민적 제도임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사적소유에 기반한 불평등과 특권은 합법화되고, 부와 권력을 독점한 계급이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 대중의 권리와 존엄을 유린하는 극단한 개인주의 사회가 나타난다. 공공서비스의 시장화로 가난한 사람은 기본 의료나 교육도 받기 어려워지고, 노동의 불안정으로 평범한 가정이 한순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일이 빈발한다. 반면 부유층은 세습적 특권을 누리며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하여 체제를 더욱 자기 편의대로 재편한다. 이러한 현실은 신자유주의의 이상향이었던 “만인에게 풍요를”라는 약속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현대 자본주의는 날로 심각해지는 위기와 모순 속에 필연적 붕괴의 길을 걷고 있다고 정광수 박사는 지적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상 조류이며, 그 정책적 구현 또한 자본의 논리를 사회 전반에 강요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는 과학적 엄밀성이나 객관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고, 경제위기의 책임을 노동계급과 피억압민족에 전가하면서 자본의 지배체제를 유지·강화하려는 어용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자본주의는 한때의 위기를 넘기고 연명하는 듯 보였으나, 그것은 노동자민중의 희생 위에 구축된 기만적 안정에 불과했다. 2008년 금융위기와 이후 지속되는 세계경제의 불황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면적 위기로 귀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사회를 건전하게 다스리는 정책으로 될 수 없음을 세계 도처의 현실이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결론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은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 반작용으로 나타나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지배적 사조였지만, 그 이론적 허구성과 정책적 부작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명백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율과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케인즈주의를 대체하였고, 통화주의·공공선택론 등 다양한 학설을 통해 국가개입을 비판하고 자유방임 원리를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들은 자본주의 모순을 정확히 설명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기를 은폐하거나 전가하는 데 치중한 반동적 궤변임을 알 수 있었다.
정책적으로 신자유주의화는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되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구조조정, 일본과 유럽의 시장개혁을 거치며 지구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국의 경제는 일정 부분 효율화와 세계화를 달성한 듯했으나, 동시에 금융 불안정, 성장둔화, 실업 증가, 양극화 심화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공언과 달리 경제의 장기적 안정이나 지속적 성장을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1997년 동아시아 위기와 2008년 세계위기 등 사상 최악의 공황들을 야기하였다. 또한 사회복지 축소와 노동유연화 정책은 전세계 노동자민중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빈곤과 사회병리를 증폭시켰다.
이 모든 사실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현대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독점자본의 약탈적 지배체제이며,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근로인민대중에게는 기만적인 착취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이론은 학술적 외양을 띠고 있으나 계급적 본성이 명백하며, 정책적으로는 겉으로 시장만능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국가권력을 동원해 자본의 손실을 메워주는 위선적 이중성을 드러냈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고질병을 치유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켰고, 그 수명만 조금 연장해 주었을 뿐이다. 2008년 위기 이후 여러 나라에서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나타났지만, 세계 자본주의는 여전히 구조적 침체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광수 박사가 강조하듯,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 시장경제에 기초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떤 정책을 도입하든 날로 격화되는 위기와 모순을 피할 수 없으며 반드시 멸망하게 마련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몰락을 잠시 지연시켰을 뿐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인해 다수 대중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과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키워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은 역사의 법칙”이라는 말처럼, 인류는 결국 탐욕과 빈부격차의 자본주의를 넘어 보다 평등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흥망은 그 거대한 역사 과정의 한 에피소드로서, 자본의 위기와 반동적 대응, 그리고 필연적 파국의 귀결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것이다. 자본주의 최후의 처방처럼 추앙되던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현실은, “자유”와 “번영”의 약속이 아닌 위기와 불평등의 심화였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앞으로의 경제이론과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 늦기 전에, 인류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참고논문
정광수 『통화론적신자유주의 경제리론의 반동성』, 2014
정광수 『헌법적신자유주의 경제리론의 출현과 반동적본질』, 2017
정광수 『현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파국적후과』 김일성종합대학학보 제66권 제1호, 2020
정광수 『현대 자본주의경제의 신자유주의적 변화』 김일성종합대학학보 제68권 제1호, 2022
정광수 『1990년대초 세계적범위에서《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확대와 후과』 김일성종합대학학보 제70권 제2호,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