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감세정책
- 헌법적신자유주의
- 국가독점자본주의
- 경제군사화
- 통화론적신자유주의
- 분쟁의 정치화
- 조세제도위기
- 반공주의
- 가렴잡세
- 달러배척
- 탈규제
- 대규모감세
- 대중 민주주의
- 국가채무
- 진화론적신자유주의
- 응보형주의
- 반인민적정책
- 프랑스검찰제도
- 복지축소
- 공공선택학파
- 거대한 정부
- 야경국가
- 목적형론
- 근로대중세금부담
- 예산적자
- 자본주의재정위기
- 정치의 극소화
- 일본검찰제도
- 상업혁명
- 정치의 일상화
- Today
- Total
생각의 서재
한국 검찰제도에 대한 헌법적·제도적 분석 본문
Ⅰ. 서론
대한민국의 검찰제도는 오랫동안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에서 개혁의 중심 의제로 논의되어 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검찰개혁 논의는 이미 20여 년을 넘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검찰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냉소적이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검찰제도 개혁은 요원해 보이기까지 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만큼 검찰권의 구조적 문제와 개혁의 난항은 한국 법치주의의 주요한 과제로 자리해 왔다.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로서 형사사법을 수행하는 핵심 국가기관이지만, 한국의 검찰은 막강한 권한의 집중과 민주적 통제의 부족으로 인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비유되어 왔다. 실제로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면서 권한을 오·남용해 왔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은 검찰개혁 담론의 배경을 이루며, 최근 수년간 정치적 격변을 거쳐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검찰제도 개편이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특히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분기점으로,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선언하고 강도 높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공수처 신설(2020), 검·경 수사권 조정(2020~2021), 검찰 직접수사 범위 축소(2022) 등 형사사법 구조의 대변혁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검찰제도를 헌법적·역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것은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중요하다. 검찰권의 헌법상 근거와 한계를 분석함으로써 제도에 내재한 헌법적 결함이나 민주적 정당성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한국 검찰제도의 형성과 변천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제도적 경로의존성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어떠한 정치·사회적 요인이 제도 변화를 가로막거나 촉진했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검찰의 수사권·기소권 등 핵심 권한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면 기존 구조의 문제점과 최근 개혁의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Ⅱ. 한국 검찰제도의 헌법적 근거와 법적 지위
한국 헌법은 검찰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상세한 규율을 두고 있지 않다. 헌법 조문상 검찰 관련 규정은 극히 제한적인데, 현행 헌법에는 두 가지 조항이 간접적으로 검찰을 언급한다. 첫째, 대통령의 검찰총장 임명에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한 규정이 있다. 이는 행정부 수반의 검찰총장 임명권을 절차적으로 견제하여 인사의 신중을 기하려는 취지이다. 둘째, 영장주의 조항에서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영장을 발부하도록 규정하여, 체포·구속·압수·수색 등에 관한 영장청구권자를 검사로 한정하고 있다. 이 두 조항을 통해 헌법은 검찰제도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일부 기능을 헌법적 사항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예컨대 헌법에 영장신청권자를 검사로 명시한 것은 검찰제도를 헌법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입법자가 검찰제도를 아예 폐지하거나 검사가 아닌 다른 기관에 영장청구권을 부여하는 것은 입법재량의 한계에 속한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헌법이 검찰을 부분적이나마 헌법기관으로 인정하였으므로, 검찰을 폐지하는 법 개정은 헌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적 승인에도 불구하고, 헌법은 검찰의 구체적 권한 예컨대 수사권 또는 소추권(기소권) 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헌법은 검사에게 영장을 신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서도, 검찰이 형사사건의 수사를 담당하는지 또는 공소를 제기·유지하는 권한을 갖는지 등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검찰권의 내용과 범위는 대부분 법률에 위임되어 있으며,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 등의 개별 법령에 의해 결정된다. 학설상 이 점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어 왔다. 일부는 헌법에 검찰총장 임명과 영장신청을 규정한 취지상, 헌법이 당연히 검찰의 수사·소추 기능을 예정했다고 본다. 반면 다른 견해는 헌법 조문에 없는 사항까지 추론하여 헌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데 신중해야 하며, 검찰의 구체적 권한 설정은 원칙적으로 입법자의 정책적 결정 범위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논쟁은 한국 검찰제도의 헌법상 위상 모호성을 보여준다.
헌법 규정의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대표적 문제가 영장청구권 조항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제3항은 “체포·구속·압수·수색에는 검사의 신청에 의해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필요로 한다”고 규정한다. 이 조항 때문에 모든 강제수사는 검사 관여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입법례로 지적된다. 실제로 미국·독일·스위스·일본 등 많은 국가들의 헌법에는 검찰에 관한 규정이 전혀 없고, 영장 발부에 검사 신청을 요구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이러한 배경에서 학계와 실무에서는 헌법상 영장신청권 조항을 삭제하거나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문재인 정부도 2018년 발의한 개헌안에 이 조항의 삭제를 포함시켰는데, 영장청구 주체는 법률로 정할 사항이므로 헌법에서 굳이 검사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조항의 존치 여부를 둘러싼 이 논란은, 해당 규정이 경찰의 독자적 수사 등 개혁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인식과 맞물려 있다. 현행 헌법하에서는 경찰이 자체적으로 영장을 법원에 청구할 수 없기에, 수사 절차상 검사 개입이 전제된다. 이에 영장청구권 조항을 손질하지 않고서는 완전한 검경 분리나 수사 구조 개편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헌법에 검찰 관련 명시 규정이 부족한 현실을 두고, 이를 헌법해석을 통해 보완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예컨대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이자 인권옹호기관”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해석은, 영장청구권 조항의 “검사”를 검찰청법상의 검사로 한정하지 않고 공소 제기 권한을 가진 모든 법률상 검사로 넓게 본 판례이다. 이 판례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검사들에게도 영장신청 권한을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로, 실제 공수처 신설 후 공수처 검사가 영장을 청구하는 것이 위헌인지 문제가 되었을 때 인용되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검사’는 검찰청법상의 검사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통해 공수처 검사도 영장청구 주체에 포함됨을 명확히 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헌법 조항을 탄력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새 제도에 부합하도록 한 것이지만, 동시에 헌법 규정 자체의 추상성과 한계를 드러낸 사례이기도 하다.
요컨대, 한국 검찰제도의 헌법적 근거는 제한적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는다. 헌법이 검찰총장 임명 절차와 영장신청권자를 규정한 것은, 최소한 검찰의 존립과 기본적 절차를 헌법적 차원에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입법자가 검찰 제도를 폐지하거나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동시에 헌법에 구체적 내용이 없다는 점은, 입법권의 광범한 재량을 허용하여 시대적 요구에 따라 제도를 변경할 여지도 준다. 결국 검찰의 지위와 권한에 관한 한, 헌법과 법률의 경계가 분명치 않아서 생기는 해석상·정책상 과제가 존재해 왔다. 이러한 모호성을 해소하고 검찰의 독립성과 책임성을 담보하기 위해, 일각에서는 헌법에 보다 명확한 규정을 두자는 제안도 있다. 가령 검찰총장의 신분보장(임기 보장, 해임 제한 등) 규정, 검찰의 권한범위 명시,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지 않는 특별검사에 대한 근거 규정 등을 헌법에 도입함으로써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내부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제안은 해외 입헌례를 참고한 것으로, 일부 국가(예: 폴란드 1952년 헌법 등 과거 사회주의권 헌법)에서는 검찰 조직과 총장의 지위를 헌법에 규정한 사례도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비록 현재까지 한국에서 검찰 관련 헌법 개정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최근 개혁의 연장선에서 헌법적 뒷받침에 대한 논의는 향후 재개될 가능성이 있다.
Ⅲ. 한국 검찰제도의 역사적 형성과 변천 과정
1. 근대적 검찰제도의 기원과 일제시기
한국에서 검찰제도의 개념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세기 말 근대 사법제도의 형성과 함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서구식 사법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1895년 재판소구성법의 제정을 통해 근대적 법원의 설치와 더불어 검사 직제가 함께 창설되었다. 당시 제정된 검사직제령에 따라 근대적 의미의 검찰제도가 발족하였으며, 이는 서구 탄핵주의(accusatorial system)의 수용으로서 형사소추를 담당하는 새로운 관직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 시기 검사들은 조직상 각급 재판소(법원)의 구성원에 불과하였으나, 무제한의 강제수사권 등 독자적 직무권한을 부여받아 형사절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재판을 주도하는 법관과는 별도로 범죄의 수사와 기소를 담당하는 관직으로서 검사가 등장한 것이다. 이 초기 도입기의 특징은 검사들이 사법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광범위한 수사권을 행사했다는 점으로, 이는 전통적 재판관과는 다른 새로운 권력으로서 자리잡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로부터 몇십 년 뒤, 일제 식민지 통치기(1910~1945년)를 거치면서 한국의 검찰제도는 일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위해 1912년 조선형사령을 제정하여 자국의 사법체계와 검찰제도를 조선에 그대로 이식하였다. 이 조선형사령에 따르면, 조선총독이 임명한 검사가 수사·기소권을 독점하는 수사 주재자로 규정되었고, 사법경찰관은 검사 지휘를 받는 수사의 보조자로 위치지어졌다. 즉 법제 상으로는 검사에게 경찰을 지휘·감독하며 수사를 총괄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명문화되었는데, 이는 식민지 조선의 형사사법체계에서 검찰 우위 원칙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식민 통치의 필요 때문에, 일본은 조선에서만의 예외를 두어 경찰에게 검사의 지휘 없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도 일부 부여하였다. 예컨대, 일본 본토와 달리 조선의 경찰에는 독자적 강제수사권과 즉결처분권 등이 허용되어, 실질적으로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고도 경찰이 사건을 종결하거나 피의자에 대한 처벌을 일부 집행할 수 있었다. 이는 식민지 초기에 검찰 인력과 조직이 충분하지 않았던 현실, 그리고 효율적 탄압을 위해 경찰에 보다 큰 재량을 준 식민 통치 전략에 기인한다. 그 결과 법제도적으로는 검사가 경찰보다 상위에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경찰 권한이 막강하였고 검찰의 통제는 유명무실한 측면이 있었다. 검찰조직의 규모도 경찰에 비해 현저히 적어서 경찰의 권한 남용에 대한 실질적 견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식민 통치 말기에는 정세의 변화에 따라 검찰의 역할이 다시 부각된다.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상범 단속을 위한 공안검찰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나아가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치안에 관하여는 검사를 통한 단일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는 전시 동원체제 하에서 경찰 권한마저 검찰을 매개로 통합하려 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일제하에서는 법률상으로는 검사가 수사와 소추의 전권을 쥐고 경찰을 지휘하는 구조였지만, 초기 현실에서는 경찰 권력이 지배적이었고, 후기에는 다시 검찰이 이념탄압의 전면에 나서는 등 부침이 있었다. 그럼에도 큰 틀에서는 일본식 검찰제도 – 중앙집권적이고 계서적인 검찰조직, 검사에 의한 수사지휘 – 가 한국에 뿌리내린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원형(原型)은 해방 후에도 제도 설계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해방 직후부터 제헌기에 이르는 논의에서 “일제 잔재 청산”과 함께 “근대적 제도 계승”이 혼재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검찰제도의 경우 일제 잔재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구조는 계승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 연구는 한국 검찰의 현재 모습이 “길게는 100년도 넘게 지속되어 온 과거 모습 그대로”라고 평가하며, 식민지 시기의 검찰제도까지 그 기원을 소급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2. 해방 후 제헌과 제1공화국: 제도의 정립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일본식 사법체계를 개편하고자 시도하였다. 1945년 12월 미군정은 ‘법무국 검사에 대한 훈령 제3호’를 통해 미국식 형사사법제도를 일부 도입하려 하였는데, 그 핵심은 검사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즉, 검찰은 기소권만 행사하고 수사는 경찰이 독자적으로 담당하도록 체제를 바꾸려 한 것이다. 이는 미군정이 일본 본토에서 실시한 검찰제도 개혁(전후 일본에서 검사 수사지휘권을 약화시키고 경찰의 역할을 강화한 조치)과 미국 자체의 제도를 참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실험은 곧 심각한 저항과 혼란에 부딪혔다. 한국인 검사 수뇌부는 수사권 박탈을 두고 강력히 반발하였고, 일선 경찰은 검찰 지휘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 경찰이 함부로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들이 속출하면서 (당시 혼란기에 경찰의 반인권적 폭압이 문제가 되었다고 전한다), 미군정의 구상은 현실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움을 드러냈다. 결국 미군정은 이 훈령을 폐지하고 기존의 식민지 형사사법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불과 몇 달 사이 일어난 이 에피소드는, 한국 검찰제도가 일탈 시도를 짧게 겪었으나 경로의존적 힘에 의해 곧 원형으로 복귀했음을 보여준다. 제도 초기부터 검찰 조직과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집단적으로 움직였고, 미군정이라는 외부 권력도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결국 검찰의 주장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이후 전개될 검찰제도사의 경향을 예고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한국은 자체 입법 기관인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법률 제정을 시작했다. 이 때 검찰제도의 법적 기반도 새로 마련되었다. 1948년 헌법은 검찰에 관해 별도 조항을 두지 않았지만, 1949년 제헌국회는 검찰청법(법률 제법21호)을 제정하여 검찰 조직과 기능을 정식으로 규율하였다. 1949년 12월에 제정·시행된 이 제정 검찰청법은 첫째, 검찰을 법원으로부터 독립된 조직으로 구성하였다. 일제 하에서는 검사가 사법부 소속이었지만, 제헌 헌법 체제 아래에서는 행정부 산하에 독립된 검찰기관을 둔 것이다. 둘째, 동법은 검사의 직무로서 “범죄를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하며 그 유지를 위한 행위”를 명시하였고, 아울러 “범죄 수사에 관하여 사법경찰관리(경찰)를 지휘·감독”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즉 법률상 검사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부여하면서, 경찰에 대한 구체적 지휘·감독권을 규정한 것이다(검찰청법 제5조). 또한 같은 법 제35조는 “사법경찰관리는 수사에 있어 관할 검사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고 하여 검사의 지휘에 대한 경찰의 복종 의무를 천명했다. 이어 1954년 제정·시행된 형사소송법도 검사를 “수사의 주재자”로 규정하여 사법경찰관을 지휘·감독하도록 하였으며(제196조), 검사의 기소독점권(제246조)과 기소편의권(제247조)을 명문화하였다. 다시 말해, 기소 여부는 전적으로 검사의 재량에 속하며, 범죄 혐의가 있어도 공익상 필요에 따라 불기소 처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1949년 검찰청법과 1954년 형사소송법을 통해 대한민국은 “검사에 의한 수사·소추 일원화”라는 구조를 공식 채택하였다. 이는 해방 직후 미군정기 시도되었던 검·경 분리 모델과 정반대의 결론으로서, 일제식 검찰제도의 부활이자 한층 강화된 제도적 확립이라 평가된다. 입법 과정에서 반대나 논란도 있었으나, 당시 정부와 국회는 “형사법상 검찰이 수사를 주재함과 동시에 기소권을 독점한다”는 입법적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된다. 이는 제헌 직후 국가체제 정비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 형벌권 행사를 위한 선택으로 볼 수 있는데, 새로운 정부가 치안 확보와 반공 체제 구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시대적 맥락과도 부합한다.
다만, 이러한 제도 정비가 곧바로 현실 권력으로서 검찰의 우위를 확보해준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 (제1공화국, 1948~1960년) 시기를 보면, 법률적으로는 검찰에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음에도 정치·행정 현실에서는 검찰이 때로는 정부와 대립하거나 경찰에 밀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제헌국회 당시에는 무소속 등 반여당 계열 국회의원이 다수였고 정부 기반이 취약했으나, 이후 1950년대 중반 자유당이 국회를 장악하면서 입법·행정 간 충돌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사법부와 검찰 내부에는 항일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 적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추구 노선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초대 검찰·법원 간부 중에는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운 인물들이 있었고, 그 결과 정권과 사법부·검찰 간 협력과 반목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는 특히 반공 이념을 국정 기조로 삼아 사회 통제를 시도했는데, 이를 위해 대통령이 더욱 신뢰하고 동원한 기관은 검찰보다는 경찰이었다. 즉 정권 안정에 경찰력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제도적으로 아무리 검찰에 강한 권한이 주어졌어도 현실 권력 서열에서 검찰이 경찰보다 우위에 섰다고 보기 어려웠다는 지적이 있다. 한 연구는 “검찰제도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기관으로서 검찰의 위상·권한·기능이 경찰보다 높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평한다. 이는 제도적 경로의존성이 현실 전개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권-검찰 관계가 항상 일방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1950년대 말,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후 출범한 장면 내각(제2공화국, 1960~1961년)은 짧은 집권 기간 동안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 논의를 시작하였다. 이 논의에는 대법원장·대법관 선출 방식 변경, 검찰의 중립성 확보,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광범위한 사법개혁 방안이 포함되었다. 즉, 민주적 원리에 입각하여 사법부의 독립을 강화하고 검찰 권한을 재조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검찰에 대해서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높이는 방안과, 경찰과의 관계를 재설정하여 수사구조를 개선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구상은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박정희 소장의 군사쿠데타로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제1·2공화국 시기는 검찰제도의 법률적 원형이 확립되고 그것이 유지된 시기였으나, 근본적인 제도변화 시도는 외부적 사건으로 좌초된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경로의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일제 식민지로부터 형성된 검찰제도의 원형이 이승만·장면 정부를 거치며 한국적 검찰제도로 굳어졌고, 비록 잠깐의 개혁 논의가 있었으나 기존 경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음 시기로 넘어갔다고 정리할 수 있다.
3. 군사정권과 권위주의 통치 하의 강화기 (1961~1987년)
박정희 군사정부(제3공화국, 유신체제)로 대표되는 1960~70년대와, 전두환·노태우 정부(제5공화국, 제6공화국 초기)로 이어지는 1980년대까지의 시기는 한국 검찰제도가 권위주의 정권에 밀착하여 경로의존적으로 강화된 시기로 평가된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출범 직후 모든 정당과 시민단체의 정치활동을 중지시키고 공안통치를 시작함과 동시에, 검찰과 법원의 주요 보직에 군인들을 배치하여 이들 기관에 군대식 통제를 가하려 했다. 예컨대 주요 검사장직에 군 법무관 출신을 임명하고, 군사정부의 사법정책에 순응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편으로 중앙정보부와 군 보안기관 등 다른 권력기관을 전면에 내세워 정권 기반을 공고히 했는데, 이에 따라 군사정부 초기에는 검찰의 권력은 이러한 기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고 한다. 즉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경찰·정보기관 등 타 기관이 주력으로 동원되고, 검찰은 그들보다는 2선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런 상황에서도 권력기관 간 내부 경쟁을 통해 군사정권의 신임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국가보안법·반공법 사건 등 정권의 안위와 직결된 사건에서 검찰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고자 했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 성립 이후에는 검찰의 정권 충성도가 더욱 노골화되었다. 유신헌법 아래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절대화되자, 검찰은 “정권의 안위를 보전하는 통치기구 중 하나”로서 기능하며 권력에 종속된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평가된다. 정부 정책에 적극 호응하고 정적(政敵) 및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으며, 그 대가로 검찰의 위상도 전반적으로 강화되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이 시기 검찰 내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전담하는 특수부서들이 설치·확대되었고, 공안검사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또한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 등 요직이 정권 핵심과 긴밀히 연결되어 정치검찰화 현상이 심화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는 법규정상의 큰 변화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관통하여 1960~80년대에 검찰권 핵심인 수사권 및 기소권 관련 법령은 거의 손대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는 독재 권력이 입법부까지 장악한 상황에서, 검찰을 견제하기보다는 활용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신정권과 제5공화국 정권은 국회를 통해 자기 입맛대로 선거법을 개정하고 정당 체제를 통제했지만, 검찰청법이나 형사소송법을 개혁하여 검찰 권한을 축소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경로의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 검찰제도는 제도적 틀 자체는 “점진적·연속적 변화”를 거듭하며 유지·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겉으로 보기에는 제도 변화가 없는 “정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권과 결탁한 검찰권 남용 관행이 심화되는 실질적 변화가 있었다. 박정희 후반기에는 검찰이 정권 유지를 위한 핵심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고, 검찰 역시 이에 부응하여 자신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해 나갔다고 한다. 이런 변화는 법 개정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제도 운용상의 변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권위주의 시절에도 약간의 제도 변동은 있었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고 문민 통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검찰에도 일부 중립성 확보 조치가 취해졌다. 그 대표 사례가 검찰총장 임기제 도입(1988년)이다. 5공화국 말 노태우 정부 초기인 1988년 12월 검찰청법 개정을 통해 검찰총장의 임기(2년 보장)를 법제화하였는데, 이는 그간 정권의 필요에 따라 검찰총장을 수시로 교체하며 검찰을 장악하던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정치권으로부터 검찰총장의 신분을 어느 정도 독립시켜주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개정을 제외하면,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과도기에도 검찰 권한 구조 자체는 건드려지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는 본질적으로 군 출신 대통령이었고, 5공 청산을 어느 정도 했지만 검찰권에 대한 제어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다만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0년, 동일체원칙 폐지 논의나 법무부 장관의 구체적 수사지휘권 명문화 등의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실제 입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 출범 이전까지의 시기는 검찰제도의 경로의존성이 극대화된 시기로 요약된다. 제도변화의 시도나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 특히 제5공화국 말기에 사법민주화 요구가 있었음에도 – 권력구조상 검찰개혁은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오히려 정권 차원에서 검찰을 통제·활용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 임민주(2022)의 연구는 이 시기를 “검찰제도 강화기”로 명명하며, 기존 검찰제도(원형)가 법규정 변화 없이도 정권과의 밀착을 통해 실질적으로 강화된 사례로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노태우 시기에 검찰제도는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변화 형태를 보였는데, 이는 겉보기에 큰 변화 없으나 경로의존성이 계속 축적된 경우이다. 이러한 경로의존적 강화는 훗날 민주화 이후 검찰이 독자적인 강력 기관으로 부상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독재정권 하에서 누적된 조직적 권한과 문화가 그대로 1990년대 이후로 이월(移越)되었고, 이는 새로운 정치 환경 속에서 새로운 도전과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4. 문민정부와 민주화 시대의 심화기 (1988~2007년)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출범한 문민정부들(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기)은 정치체제의 변화 속에서 검찰제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시기는 검찰이 더 이상 군사독재의 하부 기관이 아니라, 독립적인 국가기관으로서 독자적 세력화를 이룬 시기로 특징지어진다. 동시에 권위주의 시기 검찰의 행태에 대한 반성으로 검찰개혁 요구가 본격화되었으나, 그 실현은 번번이 좌절되어 제도 자체의 큰 틀은 경로의존적으로 유지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면성을 담아, 본 기간을 검찰제도 “심화기”로 부를 수 있다: 즉 검찰이 한편으로는 정권으로부터 일정 정도 독립하여 권력이 심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제도가 지속됨으로써 경로의존성이 심화된 시기이다.
첫 문민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1993~1998년) 집권 초기에는 군부 세력을 척결하고 부패를 일소하겠다는 개혁 드라이브가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취임 직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일명 “공직자윤리법” 개정)와 금융실명제 실시 등 개혁을 단행했고, 사정(司正) 작업의 일환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리를 수사·기소하도록 검찰에 지시하였다. 검찰은 이에 부응하여 전·노 두 사람을 구속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사건은 검찰이 과거 최고 권력자였던 인물들을 법정에 세운 것으로, 검찰의 권력 독립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즉 적어도 과거 권위주의 통치자들에 대해서는 검찰이 정치적 외풍 없이 엄정히 법 집행을 할 수 있음을 과시한 것이다. 이는 검찰이 더 이상 현직 독재자의 명령만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자 기관으로 발돋움했음을 의미한다. 다만 김영삼 정부 후반으로 가면서 이러한 사정 드라이브는 약화되었고, 오히려 대통령 측근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 미진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즉 초반에는 개혁의 도구였던 검찰이, 후반에는 정권 유지에 편의적으로 이용되거나 또는 정권 말기 레임덕 상황에서 통제가 어려워지는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김영삼 정부는 임기 말 IMF 경제위기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졌고, 그 과정에서 검찰개혁과 같은 사법개혁 과제는 주요 의제에서 다소 밀려났다.
김대중 대통령(1998~2003년)은 사상 첫 정권교체로 집권한 진보 성향의 대통령으로서, 검찰개혁에 일정한 의지를 보였다. 김대중 정부는 취임 초기 “국정원·검찰·경찰 등 권력기관의 개혁”을 천명하고, 특히 검찰에 대해서는 중수부(대검 중앙수사부) 폐지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과 같은 아이디어를 여당과 시민사회에서 제기하기 시작했다. 중수부는 검찰 내 특수부서로 고위층 부패 수사를 전담해왔지만 정치적 논란이 많았던 기관이고, 공직자비리수사처(일명 공수처)는 고위층을 검찰이 제 식구 감싸기로 제대로 기소하지 않는다는 비판 속에 나온 대안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이 두 의제가 처음 공식 제기되어 국회에 법안이 제출되는 등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여소야대 국회 등의 정치지형으로 인해 관련 입법이 통과되지 못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검찰과 대체로 협조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집권 초기 IMF 위기 극복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수행해야 했기에, 정권 차원에서 굳이 검찰과 충돌을 빚으며 조직 개편을 강행할 여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김대중 정부는 부분적 조치를 통해 검찰권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예를 들어 1998년 특검제(특별검사제)를 처음 도입하여 특정 사건에 외부 특별검사가 수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99년에는 최초의 특별검사가 임명되어 “옷로비 사건”을 수사하기도 했다. 이 특검제는 필요 시 일시적으로 검찰의 수사권을 대체할 별도 수사기구를 두는 것으로, 비록 상설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기존 검찰에 대한 보완장치로 기능했다. 또한 김대중 정부 후반인 2002년, 검경 수사권 조정의 일환으로 대검찰청에 검·경협의회를 구성하여 경찰의 수사 자율성 확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검찰제도 기본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공수처 구상 등 근본적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한 채 다음 정권으로 넘어갔다.
노무현 대통령(2003~2008년)은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출범하며 검찰개혁을 국정과제의 최우선 순위 중 하나로 내걸었다. 그는 후보 시절부터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대통령 당선 후 “검찰은 국민 전체에 봉사하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했다. 노무현 정부는 검찰에 대한 인사·조직 운용 면에서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우선 청와대 민정수석에 비(非)검찰 출신인 변호사 출신 문재인을 임명하고, 법무부 장관에도 판사 출신 강금실 등을 기용하여 검찰 외부 인사들이 검찰을 견제하거나 개혁안을 추진하도록 했다. 이는 검찰 출신이 아닌 법률가들이 검찰 인사와 운영에 영향력을 미치게 한 것으로, 조직 내부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또한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단행하면서, 과거 권력에 협조적이었던 검사들을 과감히 좌천시키고 개혁 성향으로 평가되는 검사들을 승진 임명하여 세대교체를 꾀했다. 이런 인사를 통해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도모하려 했으나, 검찰 내부 반발도 상당했다.
노무현 정부는 법제도적 개혁 방안도 추진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위한 논의를 재개하여, 2004년경에는 경찰에 1차 수사권을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또한 검찰 내부 비리에 대응하기 위해 대검찰청 감찰기능을 강화하고,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검찰위원회(자문기구)를 설치하는 등 투명성 제고 조치를 취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고비마다 특별검사를 도입해서 정권 관련 의혹을 규명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자신의 친인척이나 측근 비리 의혹에 대해 여러 차례 특검 수사를 수용하였다. 이는 과거 권력자들과 달리 검찰을 통하지 않는 독립적 수사를 허용함으로써 검찰권을 일정부분 견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특검 도입은 “결국 중요한 사건은 검찰 대신 특별검사가 수사하게 된다”는 인식을 주어 검찰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검찰개혁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첫째, 제도 입법화 실패. 검찰 권한 구조를 바꾸는 핵심 법안들, 예컨대 공수처 신설법안이나 검찰청법 개정안(검사동일체 원칙 폐지 등)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했음에도, 내부 분열과 검찰개혁 이슈의 우선순위 하락 등으로 입법 추진력이 부족했다.
둘째, 검찰 조직의 저항. 2003년 “검사와의 대화”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검사들과 토론을 벌였으나, 일부 검사들의 거센 반발과 공개적 비판이 이어졌다. 검찰 내부에서는 “정치권이 검찰을 길들이려 한다”는 불만과 함께 조직적인 반대 기류가 팽배했다. 이러한 저항은 검찰 수뇌부 인사 때 집단 사표 제출 사태 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셋째, 정권과 검찰의 갈등 심화. 임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사건들이 불거지고, 검찰이 이를 수사하면서 정권과 검찰은 정면충돌 양상을 보였다. 특히 2005~2006년의 여러 사건에서 검찰은 청와대와 여권 인사를 수사하였고, 대통령은 “검찰이 짜맞추기 수사를 한다”고 비판하는 등 대립이 공개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제도 개혁 논의는 더욱 난항을 겪었고, 결국 노무현 정부 말기에도 제도적 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그 본인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비극적 사태가 발생하면서 검찰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큰 상처를 입었다. 당시 야당과 진보 진영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표적·과잉수사가 비극을 불렀다”고 맹비난하였고, 보수 언론의 피의사실 공표도 함께 문제삼았다. 이 사건은 이후 검찰권 남용 통제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2010년대 검찰개혁 드라이브의 밑바탕이 되었다. 요컨대 김영삼~노무현 시기는 검찰이 정권에 의해 견제받기보다는 오히려 때때로 정권을 견제하는 힘까지 갖추게 된 동시에, 이러한 검찰의 비대화에 대한 반동으로 개혁 시도가 잇따랐으나 번번이 좌절된 시기였다. 경로의존적으로 강화된 제도는 쉽사리 바뀌지 않았고, 개혁 시도와 실패라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이로 인해 검찰제도는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불신과 갈등이 누적되는 심화(深化) 국면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임민주는 이 기간을 “경로의존성 심화”로 규정하며, 검찰이 정권과 대립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개혁은 무산되어 제도변화가 없었던 시기라고 요약한다.
5. 이명박·박근혜 정부: 개혁 논의의 소강기 (2008~2016년)
이명박 정부(2008~2013년)와 박근혜 정부(2013~2017년) 시기는 앞선 참여정부 시기의 개혁 동력이 크게 약화되고, 검찰과 정권이 이해를 같이하여 기존 검찰제도가 경로의존적으로 유지된 시기로 평가된다. 임민주는 이 시기를 검찰제도 “소강기”로 명명하며, 김영삼~노무현 정부의 포괄적 개혁 논의가 모두 중단되고 제도 변화 시도가 없었던 시기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이전 진보 정부들과 달리 검찰개혁에 별다른 공약을 제시하지 않았고, 집권 후 초기에도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검찰개혁 논의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처럼 검찰을 정권 안위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했고, 검찰도 이에 부응하여 정권 실세에 대한 수사에는 소극적이고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정권의 눈치를 보며 권력핵심에겐 부실수사, 반대세력엔 과잉수사”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는 검찰이 다시금 정치권력과 밀착하여 선별적 정의를 행한다는 인식을 굳히게 했다.
이명박 정부 전반기에는 큰 사건이 없었으나,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하며 잠잠하던 검찰개혁 논의가 폭발적으로 재점화되었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의 수사 관행을 맹렬히 비판했고, 국회에서 검찰권 견제 논의가 시작되었다. 2009년 6월 야당이 주도하여 “이명박 정권 정치보복 진상조사와 검찰 개혁”을 주장하며 국회 내 특위를 구성하려 했으나, 당시 여당(한나라당) 및 범여권 세력이 소극적 태도를 보여 큰 진전 없이 종료되었다.
그래도 이러한 움직임은 완전히 유야무야되지 않고 일부 입법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2010~2011년에 여야 간 협의로 경찰의 수사개시권을 명문화하고 검찰청법상 사법경찰관의 “복종” 의무 표현을 삭제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는 경찰이 형식적으로라도 독자적 수사 개시 권한을 가짐을 선언하고, 경찰을 검찰의 “하위 복종 기관”으로 표현하던 시대착오적 용어를 없앰으로써 경찰의 위상을 약간 높여준 조치였다. 또한 그동안 논란이 컸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를 폐지하는 방안이 2011년 말2012년 초 정치권에서 합의되었다. 다만 이 중수부 폐지는 실제 법률 개정이 늦어져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4월에 가서야 시행되었다. 어쨌든 이명박 정권 말기에 가서야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의 여파로 일부 검찰제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임민주는 “이명박 정부 시기 노무현 대통령 서거는 검찰개혁 논의를 다시 촉발시켰고, 그 결과 몇 가지 제도변화가 발생하였다”면서, 경찰의 수사권 명문화, 검찰청법상 ‘복종’ 삭제, 중수부 폐지를 그 예로 든다. 그러면서 이러한 변화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으나, 검찰권의 핵심인 수사권·기소권과 직접 관련이 없거나 명목적인 변화에 그쳐 실효성이 부족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중수부 폐지의 경우, 중수부가 없어지긴 했지만 곧장 유사 기능을 하는 “반부패부”가 대검 내 신설되어 중수부 역할 상당 부분을 대체하였다. 또한 “검찰의 직접 수사권 자체가 축소된 것이 아니었”기에, 중수부 폐지는 상징적 조치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경찰의 1차 수사종결권 인정 등도 실제 운용에서 검찰의 보완수사 요구 등을 통해 우회되기 일쑤였고, 결과적으로 이 시기 변화들은 임시방편적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로 넘어오면서 검찰제도 개혁 논의는 더더욱 힘을 잃는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대선 기간에 “검찰과 경찰의 상호견제, 검·경 수사권 분점, 검찰의 직접수사 축소, 상설특별검사제 도입, 특별감찰관제 설치” 등 여러 공약을 내세웠으나, 많은 이들이 그 진정성에 의문을 표했다. 실제 집권 후 박근혜 정부는 검찰개혁 공약 이행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핵심적인 검·경 수사권 조정과 같은 과제는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실장, 법무부 장관 등을 모두 검사 출신 인사로 채우고, 이 “검찰 출신 참모 그룹”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이를 통해 대통령은 검찰을 조직적으로 장악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검찰 역시 정권과 우호적 관계 속에서 별다른 마찰 없이 기존 체제를 유지하였다. 이명박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검찰권 남용에 대한 비판이 계속 제기되었으나, 정부 차원의 개혁 조치는 거의 전무했다.
다만 박근혜 정부에서도 앞서 언급한 중수부 폐지가 실행되었고(2013년 4월), 상설특별검사법이 제정되었으며(2014년 3월), 검찰직업공무원법(검사의 임용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등 일견 제도 개선으로 보이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 중수부 폐지는 반부패부 신설로 대체되어 실질 영향이 미미했고, 상설특검법 역시 기존에 건건이 특검법을 통과시키던 것을 일반법으로 규율했을 뿐 항구적 독립 수사기구를 상시 두는 것은 아니었다. 즉 기존 검찰제도를 크게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명목상 개혁 조치들이 취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검찰개혁에 소극적이었다는 점은 학계 연구뿐 아니라 그 당시 여권 인사들의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공약으로 내걸었던 검찰개혁안들이 임기 내내 진척되지 않자, 2016년 총선 즈음에 여당 의원들도 일부 검찰개혁 법안을 발의했지만, 곧이어 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모든 정치·사회적 이슈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면서 검찰개혁 논의 역시 중단되었다. 201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검찰이 국정농단 수사에 참여하면서 (특검팀과 별도로) 정부 비리 규명에 나섰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검찰이 개혁 대상이자 동시에 부패 척결의 주체로 이중적 역할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임민주는 이명박·박근혜 시기를 “경로의존성 유지기”로 규정하며, 이 시기 정권과 검찰의 관계를 “정권의 필요”와 “검찰개혁 저지”라는 상호 이해관계에 따른 협력적 관계로 평가한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정권이 일방적으로 검찰을 지휘·종속시켰다면, 이 시기에는 정권과 검찰이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협력관계가 강했다는 것이다. 정권은 과거처럼 검찰을 정치적 목적에 동원했고, 검찰은 그 대가로 개혁 논의를 피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기존 권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2011년경 검찰에 대한 외부 압력이 높아지자, 당시 검찰총장 등은 “검찰개혁은 검찰 스스로 알아서 할 문제”라며 외부 간섭에 반발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리하면, 2008~2016년은 표면적으로 큰 변화 없이 검찰제도가 현상을 유지한 시기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노무현 서거 사건 등으로 인한 사회적 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보가 있었고, 정권-검찰 유착을 통한 권력 행사가 지속되었으며, 이에 따른 부작용(검찰 비리, 제식구 감싸기 등)이 누적되고 있었다.
6. 문재인 정부의 격변기 개혁 (2017~2022년)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한국 검찰제도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을 내걸었다. 이는 그만큼 국민적 개혁 열망이 높았고, 정치적으로 개혁 추진에 필요한 동력이 뒷받침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권력기관 개혁”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검찰개혁을 핵심 국정과제로 선언하였다. 과거 참여정부에서 검찰개혁이 좌초된 경험을 교훈 삼아, 문재인 정부는 보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개혁 전략을 수립하였다.
먼저 문재인 정부는 인적 구성부터 변화를 주었다. 청와대와 내각의 법무 관련 요직에 검찰 출신이 아닌 개혁 성향의 법률가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대표적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에 법학교수 출신 조국을 임명하고 법무부장관에 형법학자 출신 박상기, 행정안전부장관에 개혁 성향 정치인 김부겸을 임명하여 3자 협의체를 구성하도록 한 것은 상징적 조치였다. 이는 검찰 내부뿐 아니라 경찰 등 관계기관과 함께 협의하여 개혁안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검찰 일변도의 시각을 탈피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협의체는 출범 후 수개월 간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 문제 등을 집중 논의하였고, 2018년 6월 정부 합동으로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합의문의 핵심은 “검찰과 경찰이 기존의 지휘·감독의 수직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협력관계로 재정립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경찰에게 1차적 수사권 및 수사종결권을 부여하고, 검사는 보완수사 및 기소 여부 판단에 집중하도록 역할을 재조정한다는 방향이었다. 이는 수십 년 간 지속되어 온 검사가 경찰을 지휘하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청사진이었다.
동시에 문재인 정부는 또 다른 축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검찰이 권력층 비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권력에 영합해왔다는 비판에 대응하여, 대통령 공약으로 “공수처 설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앞선 참여정부 시절 법안으로 제출되었으나 무산되었던 공수처 구상은, 이번에는 집권여당이 절대다수에 가까운 의석을 확보한 상황에서 현실화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재인 정부는 공수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 등 항구적인 제도개혁을 위해서는 관련 법률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식하였고, 청와대와 내각, 여당이 삼위일체가 되어 신속히 입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기존 검찰조직 및 야당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2019년 하반기 이른바 “조국 사태”는 개혁의 진통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후임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자, 그의 가족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검찰이 전격적인 대규모 수사에 나선 것이다. 검찰은 조 장관 일가에 대해 전방위 압수수색과 기소를 단행했고, 결국 조국 장관은 임명된 지 한 달여 만에 여론 악화로 사퇴하였다. 이 사태를 둘러싸고 정권 측과 개혁 지지자들은 “검찰의 조직적 저항”이라고 받아들였다. 즉, 검찰이 자신들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개혁의 상징인 조국을 겨냥하여 항명을 했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례적인 검찰의 권력 행사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취지로 우회적 비판을 했다. 조국 사태는 사회적으로도 큰 분열을 일으켰지만, 그 결과 문재인 정부는 “검찰의 저항이 이렇게 거셀수록 더욱 강도 높은 개혁이 필요하다”며 개혁 드라이브를 늦추지 않았다.
2019년 말에서 2020년 초, 마침내 여당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강행 처리하였다. 2019년 12월 여당은 소수야당들과 공조하여 공수처 설치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안(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였는데, 당시 거대 야당(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등 저지를 피하기 위해 “패스트트랙” 절차를 활용하였다. 국회의장이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한 이 법안들은 여야 물리적 충돌 속에 표결되었고, 2020년 1월 최종 통과되었다. 그 결과, 공수처법이 제정되어 2020년 7월부터 시행 단계에 들어갔으며, 검찰청법 및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2021년부터 시행되어 수사구조가 대폭 바뀌었다.
2020년 개정된 검찰청법의 주요 내용을 보면, 검사의 직접 수사 범위를 부패범죄·경제범죄·공직자범죄·선거범죄·방위사업범죄·대형참사 등 6대 범죄로 제한하고, 그 외에는 원칙적으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검사에게 인정되던 경찰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폐지하고, 검사는 경찰이 송치한 사건에 대하여 보완수사만 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2020년 개정 형사소송법 역시, 검사와 사법경찰관은 “수사와 공소제기 및 공소유지에 관하여 서로 협력한다”는 규정을 신설하여 양자의 관계를 수평적·대등한 관계로 격상시켰다. 이로써 수직적 지휘관계는 법적으로 해체되었다. 또한 경찰에도 검사와 동일하게 1차적 수사권과 종결권을 부여함으로써, 경찰이 자체적으로 혐의없다고 판단한 사건은 검찰에 송치하지 않고 종결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경찰의 수사종결에 불복하거나 보완이 필요할 경우, 검사는 해당 사건에 대해 경찰에 보완수사 요구를 하거나, 중요 사건의 경우 직접 재수사(재차 수사개시)를 할 수 있는 규정을 두어 사후적 통제장치는 마련하였다. 한편, 수사 절차의 투명성 강화를 위해 피의자신문조서 증거능력 제한 규정도 개정되었다. 즉, 검사 작성 피신조서도 경찰 작성 조서와 동일하게 피고인이 법정에서 내용을 인정할 때만 증거로 삼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오랫동안 문제제기 되어온, 검찰 수사과정에서의 조서 중심 수사관행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설치법에 따라 2021년 1월 공식 출범하였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의 부패·권력형 범죄에 대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독립기구로, 그 관할대상에는 판사·검사·경무관 이상 경찰 등도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고위 법조인이나 권력자들에 대한 사건은 검찰이 아닌 공수처가 전담하게 되어, 검찰의 독점적 지위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공수처 검사의 지위가 헌법상 검사에 해당하는지 논란이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대로 헌법재판소는 공수처 검사도 헌법 조항의 “검사”에 포함된다고 판단하여 위헌성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공수처 신설은 검찰개혁 요구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안고 있다. 공수처에 막강한 권한이 부여된 만큼, 이 기관이 정치적으로 중립성과 수사 효율성을 보일 수 있느냐가 과제로 남았다. 초대 공수처는 출범 초기 수사 역량 미흡과 조직 구성의 어려움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몇 사건에서 성과를 내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20~2021년의 이 일련의 조치들로 문재인 정부는 검찰제도의 큰 틀을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민주는 문재인 정부 시기에 기존 검찰제도에 “중대하고 핵심적인 제도변화”가 발생하여, 해방 이후 유지되어 온 경로의존성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녀는 이 시기를 검찰제도 “격변기”로 명명하며, 변화의 양상을 “점진적·불연속적 변화”로 규정하였다. 즉 오랜 기간 축적된 개혁 논의가 임계점에 달하면서 점진적으로 추진되어 왔지만, 그 결과는 기존 경로를 단절하는 불연속적인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2017년 이전까지는 검찰제도의 원형이 여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유지·강화(형성기소강기)되었으나, 2017년 이후로는 경로 변화(path change)가 시도되고 실현되면서 경로의존성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 정부의 제도변화를 “불완전한 대체(incomplete displacement)”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존 제도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지는 않았으나 상당 부분 대체·변형하였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검찰기관 자체는 존속하되 그 권한과 위상이 크게 조정된 것이므로, 이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2022년 초, 정권 교체가 가시화되자 문재인 정부와 당시 집권여당(더불어민주당)은 임기 종료 전에 추가 개혁 입법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윤석열 전 검찰총장)가 당선되자, “남은 기간 동안 검찰의 권한을 더 축소하겠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민주당은 2022년 4월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발의하여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법률상 거의 전면 폐지하는 개정을 추진하였다. 이는 검찰의 수사권을 아예 원칙적으로 없애고, 오로지 경찰 수사에 대한 보충적 수사만 가능토록 하려는 구상이었다. 개정안 원안에 따르면 검사의 직무는 “공소 제기 및 유지에 필요한 사항”과 몇몇 특정범죄 수사로 한정되고, “수사는 사법경찰관의 직무”로 하며 검사의 수사는 다른 법률에 정한 예외 경우에만 허용하는 조항을 두었다. 이는 사실상 모든 일반 범죄 수사에서 검찰을 배제하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 처리 과정에서는 매우 극심한 파행과 논란이 벌어졌다. 국회 법사위 심의 중 민주당 소속 민형배 의원이 위장탈당하여 안건조정위원회 구성을 피하고자 한 일, 국회의장이 임시국회를 쪼개어 열어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한 일 등 초유의 절차적 시도가 이어졌다. 야당(당시 국민의힘)은 이를 두고 “헌정 사상 유례없는 입법쿠데타”라고 반발하였다. 한편 여당 내부에서도 원안에 대한 이견이 나와, 박병석 국회의장이 여야 중재안을 제시하고 본회의 수정안 가결 등 여러 번 내용이 변경되는 혼란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2022년 4월 말, 야당 의원들이 표결을 보이콧한 가운데 민주당 단독으로 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통과된 법은 애초 원안보다는 다소 완화된 형태로, 검찰의 직접수사 범위를 6대 범죄에서 2대 범죄(부패·경제범죄)로 더 축소하고, 이마저도 공소시효 등을 고려한 한시적 허용 조항을 두었다. 그 외 모든 범죄의 수사는 경찰의 권한으로 명문화되었다. 이로써 검찰의 수사권은 극소수 범죄 영역을 제외하면 완전히 박탈되었으며, 사실상 검찰은 기소권과 보충수사권만 보유하는 기관으로 법상 정의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4월 검수완박 법안” 처리 이후, 2022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이 개정 법률의 위헌성을 주장하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2023년 3월 헌법재판소는 해당 법 개정 과정의 절차상 위법 논란에도 불구하고 법 자체의 효력은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은 유지되었고, 2022년 개정법이 예정한 단계적 수사권 폐지가 2023년까지 완료되어 검찰의 직접수사는 법률상 완전히 폐지되었다. 다만 헌재 결정 중 일부 의견은 입법 과정의 절차 문제를 지적하여 국회의 입법권 남용에 경고를 보내는 등 후유증이 남았다. 또한 정부는 시행령을 개정하여 검찰이 수사할 수 있는 “2대 범죄”의 범위를 넓게 해석함으로써 법률 개정을 사실상 일부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처럼 정권 교체 후 개혁의 방향을 둘러싼 다툼이 이어지고 있어, 문재인 정부 때 확정된 검찰제도 개편의 완성도와 지속성은 현재 진행형의 문제라 할 수 있다.
Ⅳ. 수사권과 기소권 등 검찰 권한의 구조적 특징
한국 검찰제도의 핵심 권한은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요약된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형사사법체계는 “검찰주도형 형사사법체계”로 불릴 만큼, 이 두 권한이 검찰에 집중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
1. 기소독점과 기소편의주의
검찰 권한 구조의 첫째 특징은 공소제기권의 독점이다. 한국 형사소송법은 1954년 제정 이래 일관되게 “공소는 검사가 제기하여 유지한다”고 규정하여(현행 제246조), 기소독점주의를 채택해 왔다. 아무리 중대범죄라도 검사가 기소하지 않으면 재판이 열릴 수 없으며, 반대로 검사가 기소하면 국가명을 대표하여 공소유지가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경찰 등 수사기관은 사건을 종결짓지 못하고 반드시 검찰에 송치하여 검사의 불기소·기소 여부 판단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검찰은 기소편의주의 원칙 하에 공소 제기 여부를 재량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247조는 “검사는 공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설령 혐의가 소명되더라도 공익적 고려(초범의 선처, 개전의 정 등)로 불기소할 수 있음을 명시한다. 이러한 기소편의주의는 근대 형사사법에서 상당히 일반적인 원칙이지만, 한국의 경우 검찰 통제장치가 미약해 검사의 기소·불기소 재량이 사실상 절대적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예컨대 불기소 처분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재정신청이나 헌법소원으로 다툴 수 있으나 실무상 인용되기 어려워, 검찰의 결정이 곧 사법적 판단의 종결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유력 인사나 권력 관련자에 대한 무혐의 처분이나, 반대로 정치적 상대에 대한 무리한 기소 등도 내부 통제 외에는 견제 기제가 취약했다. 이로 인해 검찰의 기소권 행사가 자의적일 수 있다는 비판이 누적되었다.
2. 수사개시권과 수사지휘권
둘째 특징은, 전통적으로 검찰이 수사 개시부터 송치 후 수사까지 형사절차 전반을 통제했다는 점이다. 형사소송법은 2007년 개정 전까지 “검사는 범죄의 수사를 지휘하고 수사의 주재자이다”라고 명시하여(과거 제196조), 검사가 수사권의 주체임을 천명했다. 경찰은 “사법경찰관” 신분으로 검사의 지휘를 따라 수사업무를 수행하는 보조자로 규정되어 있었다. 검찰청법 역시 “검사는 범죄수사에 관하여 사법경찰관리(경찰)를 지휘·감독한다”는 조항을 두어(과거 제5조) 법률상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이른바 수사지휘권은 한국 검찰권의 핵심으로서, 모든 경찰 수사는 궁극적으로 검사의 지휘·감독 아래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했다. 실무적으로 검찰은 일선 경찰서의 중요 사건마다 담당 검사(이를테면 검사실의 주임검사)를 지정하여 사건 수사 전반을 지도하고, 송치 전 수사 방향을 정해주거나 보완수사를 명령하는 등의 방식으로 개입해 왔다. 이러한 구조의 장점으로는 법률 전문가인 검사가 수사 단계에서부터 관여하여 인권보장과 법적 통일성을 기할 수 있다는 점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검사의 수사지휘가 자의적이거나 소극적으로 행사되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예컨대, 검사가 관심을 가지는 사건은 경찰이 아닌 검찰이 직접 수사하도록 이첩받아 가고(심지어 사건을 경찰에서 빼앗는다는 표현도 있었다), 관심이 덜한 사건은 경찰이 올린 수사결과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심지어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지휘권 구조하에서 경찰은 늘 사건 처리에 검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 경찰 수사의 자율성과 책임성이 떨어지고 “눈치 보며 반쪽 수사”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러한 폐단을 줄이고자 2011년 형소법 개정으로 경찰의 수사개시권을 명문화하고 “검사의 명령에 복종” 문구를 삭제하였으나, 근본적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수사지휘권 폐지는 2020년 형소법 개정에서 이루어져, “검사와 사법경찰관은 상호 협력관계”로 규정됨으로써 법률상 지휘권은 사라진 상태이다.
3. 검찰 중심의 수사구조와 경찰과의 관계
상기의 기소독점과 수사지휘권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한국 형사사법의 전형적 구조는, 흔히 “검경수사권 문제”로 불린다. 오랫동안 경찰은 1차적 수사 행위자는 될 수 있어도 독자적인 수사 종결권이 없었고, 모든 사건을 검찰로 송치해야 했다. 검찰은 수사지휘 외에도 경찰이 송치한 사건의 보완수사를 지휘하고, 때로는 경찰이 불송치한 사건도 임의송치 요구를 통해 가져와 직접 수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는 행정조직 체계상으로도 드러났는데, 검찰이 법무부 소속 중앙행정기관인 데 반해 경찰은 행안부(과거 내무부) 소속 기관이므로, 정부 내 위상에서 검찰이 경찰보다 상급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실제 검찰 출신들이 경찰 고위직을 거쳐 행안부 치안국장 등을 맡으며 경찰 인사를 관장한 적도 있을 정도로, 검찰-경찰 간 위계 분위기가 존재했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경찰은 각종 사건에서 수사 초기 노무(勞務)를 담당하고, 사건의 최종 처리는 검찰이 하는 역할 분담이 고착화되었다. 이로 인해 경찰은 자신들이 공들여 수사한 사건이 검찰 단계에서 무혐의되거나 축소되는 경우 불만을 품어도 공식적으로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한편 검찰은 경찰 수사가 미진하다고 판단되면 동일 사건에 대해 “재수사”에 착수할 수도 있었고, 중요한 사건은 애초에 “검찰 직접수사”로 전환하여 경찰을 배제하고 진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등이 맡는 권력형·경제범죄 사건은 대부분 경찰이 수사 개입을 거의 하지 못하고 검찰이 처음부터 끝까지 처리하였다. 이러한 검찰 직접수사 관행은, 검찰이 경찰과 무관하게 정보 수집부터 강제수사, 기소까지 원스톱으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진 한국에서만 가능한 구조로, 검찰의 권한을 극대화시키는 요소였다.
4. 중앙집권적 조직과 내부 통제
한국 검찰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구조적 특징은 검사동일체의 원칙으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조직문화이다. “검사동일체”란 상명하복의 계층질서 속에 모든 검사가 동일한 목표와 의사로 움직인다는 일종의 이념으로, 일제시대와 독일·일본 등 대륙법계 검찰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우리나라 검찰청법 제8조는 “법무부장관은 일반적 지휘만 할 수 있고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고 규정하여, 장관→총장→일선검사로 이어지는 단선적 지휘체계를 규정해왔다. 이 규정에 근거하여 검찰 내부에서는 “개개의 검사는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지휘계통을 통해서만 통제된다”는 원리가 확립되었다. 즉 개별 검사들은 직근 상급자의 지휘를 따르고, 최종적으로는 검찰총장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법무부장관의 지휘권은 명문상 존재하나(검찰청법 제8조), 외부 정치인이 구체적 사건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관행적으로 극히 제한적으로 행사되어 왔다. 그 결과 검찰 내부적으로는 검찰총장 및 고위 간부들이 사실상 모든 검찰권 행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계층제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는 업무 효율성과 조직 단결 면에서는 장점으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조직 내부 민주성 결여와 잘못된 지휘에 대한 견제 부재를 초래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를테면 과거 “검찰의 사유화” 논란(정권과 유착하여 코드 맞는 수사만 한다거나, 또는 검찰총장이 자의적으로 사건을 골라 수사한다는 비판)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김용태 교수는 현행 검찰제도가 “행정기관 소속으로 두는 것은 큰 문제가 없지만, 검찰주도형 형사사법체계와 중앙집권형 검찰조직 체계는 헌법적 관점에서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검사동일체 원칙하의 중앙집권 구조가 권력분립과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다는 의미로, 검찰권한이 국민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러한 집중 구조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검찰 내부 통제 수단으로는 감찰제도와 인사위원회 등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이것이 실효성있게 운영되지 못했다. 검사에 대한 징계나 감찰은 법무부가 담당하지만, 통상 검찰 고위직 출신들이 법무부 요직을 맡아 식구감싸기식 처리가 이루어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또한 검찰 인사는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의 권한이지만, 실제 인사안은 검찰총장이 주도하고 인사위원회(대부분 검찰 간부들로 구성)는 추인하는 방식이어서, 검찰 수뇌부의 성향과 의중이 조직 전체를 지배했다는 평가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 시절 검사장 인사 때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추천한 검사장 후보를 발탁”하는 등 시도가 있었으나 일시적인 이벤트에 그쳤다. 검사동일체 원칙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지 않았으나, 최근 검찰 내부에서도 “지나친 상명하복 문화는 개선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선 검사들의 자율적 판단권을 확대하고, 사건 처리를 둘러싼 이견 표출의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말기인 2022년에는 검찰청법 개정으로 법무부장관의 구체적 사건에 대한 검찰총장 지휘권 자체를 삭제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으나 최종안에서는 빠졌다. 다만 2020년대 들어서는 검사들도 내부망과 회의 등에서 과거보다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문화가 싹트고 있고, 수사심의위원회 등 외부 자문기구의 권고를 따르는 사례도 등장하면서 예전보다는 조직문화에 변화 조짐이 보인다.
1. 행정부 내 위치와 정치적 중립성 문제
한국 검찰은 헌법상 행정부에 속하는 기관이다. 이는 입법부·사법부와 대등한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행정각부(법무부)의 소속 기관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제헌 헌법부터 현재까지 검찰을 별도의 헌법기관으로 두자는 논의는 없었고, 다만 헌법에 검찰총장 임명 절차를 규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행정부 소속이라는 지위는 민주적 통제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즉, 선출권력(대통령과 국회)이 검찰 인사와 운영에 관여함으로써,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통제를 가능케 한다는 논리이다. 실제 김용태 교수도 검찰을 행정기관에 속하게 두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행정부 소속으로 있는 이상,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을 위험이 상존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검찰이 정권 입맛에 맞게 움직였던 수많은 사례들은 이러한 우려를 현실화한 것이었다. 반대로 정권과 대립하며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했던 검사들은 좌천이나 사퇴로 이어지는 등 인사권에 의한 통제를 받았다. 이러한 악순환을 차단하기 위해, 검찰총장의 임기제(2년)를 도입하고 총장 인사청문회 등을 시행하고 있으나, 여전히 대통령에게 임면권이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가 있다. 문재인 정부 당시에는 검찰총장(윤석열)이 정권 수사를 지휘하자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여 총장을 배제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이어 총장에 대한 징계 청구 및 법적다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행정부 내에서 검찰의 위상과 독립성 문제가 얼마나 첨예한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결국 검찰총장은 행정부 소속 공무원이지만 그 직위의 민감성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준(準)사법기관”처럼 간주되는 애매한 지위에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검찰총장을 아예 국회 임명동의 대상으로 격상하거나, 임기 동안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해임할 수 없게 헌법에 신분 보장 조항을 두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검찰을 사법부나 입법부처럼 독립된 제3의 권력으로 헌법에 규정하여, 행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영되도록 하자는 급진적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오히려 민주적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소불위” 기관을 헌법으로 고착화할 위험이 있어 현실성은 낮다. 해외 사례를 보면, 대부분 나라에서 검찰은 행정부 소속(프랑스, 일본 등) 또는 사법부 소속(독일 일부모델, 이탈리아 등)이며, 독립 헌법기관으로 분리한 나라는 드물다. 결국 관건은 행정부 내에 두면서 어떻게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할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해법으로 “최소한 검찰총장의 신분보장, 임기 및 해임 방법 등에 대해 헌법에 규정”하여 대통령이 마음대로 해임하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지 않는 검사에 대한 특별 규정”을 둠으로써 검찰 내부의 독립성까지 보장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 일부 주(州)에서 검찰총장(주 검찰총장, Attorney General)을 주민 선거로 뽑거나, 독일처럼 연방검찰총장을 법무장관 지휘 아래 두지만 개별 사건에는 재량을 존중하는 전통 등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Ⅴ. 경로의존성과 제도변화 이론을 통한 분석
한국 검찰제도의 변천사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과 제도변화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제도는 쉽게 변하지 않으며, 어떤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기존 경로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경로의존성 개념은, 검찰제도 개혁 논의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또한 최근 학계에서 발전된 점진적 제도변화 유형론에 비추어 보아도, 한국 검찰제도는 기존 질서가 어떻게 유지·강화되다가 어떤 계기에 변화를 맞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분석된다.
임민주 교수는 해방 후 문재인 정부까지 약 70년간의 검찰제도 변화를 역사적 제도주의 시각에서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연구 질문을 던졌다. “한국 검찰제도의 원형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각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검찰제도의 변화 과정에서 경로의존성은 어떻게 나타났으며, 최근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은 제도변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시사하듯, 검찰제도는 장기간에 걸쳐 변하지 않는 축과 변하는 부분이 혼재해 왔다.
우선 1940년대 말에 확립된 검찰제도의 원형은 이후 오랫동안 경로의존적 지속을 보였다. 앞서 살펴본 대로, 1949년 검찰청법과 1954년 형사소송법으로 만들어진 검사 중심 수사구조, 기소독점주의 등의 틀은 헌정사 70여 년 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제도 자체는 일정한 안정 경로를 따랐음을 뜻한다. 이러한 경향은 역사적 제도주의에서 말하는 “경로의존성”의 전형적 사례로 볼 수 있다. 경로의존성이 작용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한국 검찰의 경우 초기 제도 설계의 자기강화 효과와 제도에 적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검찰제도 원형이 확립된 직후부터, 이를 유지하려는 강한 관성이 나타났다. 미군정 시기 미국식 모델 도입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 장면 정부 시절 개혁 논의가 쿠데타로 좌절된 것 등이 좋은 예다. 이는 외부에서 제도 변경을 시도해도 내부 행위자(검찰 수뇌부 등)의 저항과 정치적 격변 등으로 결국 원형이 고수되는 현상이었다. 그 후 권위주의 정부들을 거치는 동안에는 오히려 정권이 제도 경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왜냐하면 기존 검찰제도가 정권에 유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제도를 바꾸기보다는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면, 권력은 제도 개혁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로의존성의 논리가 그대로 들어맞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는 검찰을 통제 하에 두고 야당이나 반정부세력 탄압에 활용하였기에, 굳이 그 권력 구조를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이는 “변화 없음” 자체가 일정한 합목적성을 지니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1990년대 민주화 이후까지도 검찰 권한 구조는 전근대적이라고 할 만큼 변화하지 않은 채 존재했다는 평가가 있다. 김용태 교수는 “짧게는 60년, 길게는 100년도 넘게 지속되어 현행 헌법에 이른 검찰의 현재 모습은 과거와 본질적으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과거 모습 그대로”라고 언급하여, 경로의존성의 강도를 강조하였다.
한편, 경로의존성 하에서도 점진적 변화는 일어나곤 한다. Streeck & Thelen(2005)이나 Mahoney & Thelen(2010)의 제도변화 유형론에 따르면, 제도가 외견상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 같아도 미세한 조정이나 누적적 변화가 진행될 수 있다. 한국 검찰제도 역시 법률상 큰 개정은 없어도, 운영상의 변용이나 부수적 제도 도입 등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88년 검찰총장 임기제 도입은 경로의 큰 흐름을 바꾸진 않았으나 층화(layering)에 해당하는 변화였다. 기존 제도의 틀 위에 임기 보장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덧붙인 것으로, 이는 제도의 지속성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 받아들여졌다. 1999년 특검법 제정이나 2011년 경찰 수사권 일부 승인 등도 모두 부분적 개혁으로, 기존 경로를 잠식(drift)시키거나 새로운 요소를 부가(layering)하는 유형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경로 자체를 변경시키지는 못했지만, 훗날 더 큰 변화를 준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박지숙 교수는 김대중 정부 이후 다양한 검찰제도 변화 시도가 조금씩 “겹침(층화, 가겹 형태)으로 쌓이고 표류”하면서 문재인 정부에서 “누적적 전환”을 이루었다고 분석한다. 즉 소규모 변화들이 축적된 결과로 큰 전환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녀의 연구는 또한 검찰권 이해관계 연합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25년간 실질적 제도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경로의존 상황을 확인하였다. 이는 이익 집단과 제도 경로 간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신제도주의적 설명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왜 문재인 정부 시기에 와서 경로가 변경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제도주의 이론에서는 “임계적 상황” 또는 “급진적 변화”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주목한다. 한국 검찰제도의 경우 2016~2017년의 정치사회적 대격변이 바로 그러한 임계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매우 예외적 상황이었고, 기존 권력질서가 유동화된 시점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이 붕괴하면서, 그동안 눌려왔던 “권력기관 개혁” 요구가 임계치를 넘어 분출하였다. 특히 검찰은 국정농단 수사에 참여하여 한편으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왜 이런 국정농단을 미연에 저지하지 못했나” 하는 비판도 받았다. 그 직전 시기 검찰 내부 비리 사건들(2016년 홍만표·진경준 검사장 비리 사건 등)도 겹치면서, 검찰에 대한 여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개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결집되었다. 이러한 외부환경 변화는 제도변화의 창을 열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개혁 의지가 확고했고, 국회 다수당도 이를 뒷받침하였다. 다시 말해,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행위자들이 권력정치에서 우위를 점한 희귀한 경우였다. 경로의존성을 깨는 데 필요한 충분한 정치적 자원과 인식 변화가 마련된 것이다.
제도변화 이론에서 Mahoney & Thelen(2010)은 제도운영자의 재량과 거부권자의 힘을 기준으로 층화(Layering), 대체(Displacement), 표류(Drift), 전환(Conversion) 네 가지 변화를 구분한다. 문재인 정부의 변화는 이 중 “대체 내지 전환”에 가깝다고 평가된다. 왜냐하면 검찰제도의 핵심 요소 중 일부(수사권 부분)는 다른 기관(경찰, 공수처)으로 이관되어 기능이 대체되었고, 나머지 부분(기소권 중심)은 역할이 재규정되었기 때문이다. Mahoney & Thelen 분류로는, 검찰의 직접수사권 폐지는 기존 제도의 일부를 제거하고 새로운 규칙으로 대체한 것이므로 부분적라 할 수 있다. 또 검찰-경찰 관계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꾼 것은 제도의 운영 논리를 바꾼 것이므로 전환요소도 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에서 중수부 폐지 등이 층화로 조금씩 쌓여오다, 문재인 정부에서 결정적 전환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누적적 전환”이라 볼 수 있다. 임민주의 분석대로 완전한 대체가 아니기에 “불완전한 대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변화에도 경로의존적 요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경로의존성은 흔히 “관성”으로만 이해되지만, 때로는 변화를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에서도 검찰의 공소권 독점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 결과 형사사법에서 가장 중요한 기소 단계는 여전히 검찰의 손에 남아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설령 수사권이 많이 축소되어도 검찰은 여전히 사법절차의 게이트키퍼로서 영향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검찰은 경찰이 송치한 사건에 대해 보완수사를 명목으로 재수사에 가까운 행위를 하거나, 경찰 불송치 결정 사건을 들여다보고 직접 사건을 가져와 기소하는 등 새로운 적응 전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제도가 변화해도 기존 조직이 자기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적응하는 전형적 모습으로, 제도변화 이론의 전환이나 표류에 해당할 수 있다. 또한 2022년 정권이 교체되자 검찰 출신 대통령과 그 동료들은 곧바로 “검찰 정상화”를 주장하며 수사권 일부 회복을 추진했다. 이는 기존 경로로의 복귀 움직임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경로의존성 이론에서 말하는 “경로수복” 시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한 번 경로를 벗어난 듯 보여도 상황이 달라지면 옛 경로로 돌아가려는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박지숙 교수의 연구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그녀는 1998년 김대중 정부부터 2020년 문재인 정부까지 검찰제도 변화를 행정학적 분석으로 시도하면서, 변화가 지지부진했던 이유를 “청와대-법무부-국회 검찰출신 인사의 정책옹호연합(advocacy coalition)이 강한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관점은 정책지속 및 변화에 관한 “정책 레거시”와 “이익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검찰 출신 인맥은 행정부와 입법부 곳곳에 포진해 있었고, 이들이 은연중에 현 상태 유지를 옹호함으로써 경로의존성이 유지되었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역사적 제도주의의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제도가 한 번 자리잡으면 그 수혜자들이 형성되고, 그 수혜자들은 제도 변경을 저지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검찰 엘리트들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정계와 관료계에 넓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개혁입법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대표적 예로, 2004년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일 때도 공수처법이 통과되지 못했고, 2011년 한나라당 정부 때 여당 의원들이 검찰개혁 법안을 내놓았으나 당론화되지 못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제도적 이익연합의 저항은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나타나, 2019년 법무부 장관 후보자 낙마라는 파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결국 경로의존성은 단순한 추상력이 아니라 이익과 권력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참고논문
김용태, 「한국 헌법과 검찰제도」, 서울법학 제21권 제3호 (2014)
박지숙, 「검찰제도개편의 경로변화 연구: 역사적 제도주의의 점진적 제도변화 모형을 토대로」, 한국정책학회보 제33권 1호 (2024)
임민주, 「한국 검찰제도의 역사적 변천과 제도변화 분석: 경로의존성과 제도변화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정책학회, 동계학술대회(2024)
허장환, 「검찰제도에 관한 헌법적 연구」, 법조 제71권 제6호 (2022)
조선형사령(1912) https://www.law.go.kr/%EB%B2%95%EB%A0%B9/%EC%A1%B0%EC%84%A0%ED%98%95%EC%82%AC%EB%A0%B9/(00011,19120318)
조선형사령
www.law.go.kr
미군정 관보 1945년 12월 검사의 선결직무 (검사에 대한 훈령 제3호)
https://db.history.go.kr/contemp/gb/level.do?levelId=gbmg_1945_12_29_a0052
미군정 관보 < 한국 현대 사료 DB
Office of the Military Governor Bureau of JusticeSeoul, Korea 1. The primary function of all prosecutors is the successful prosecution of cases before a Court of competent jurisdiction. The details of investigations are a burden, which Prosecutors should n
db.history.go.kr
검찰청법(1949)
https://bigcase.ai/law/%EA%B2%80%EC%B0%B0%EC%B2%AD%EB%B2%95?refDate=19491220
검찰청법 | 시행 1949. 12. 20.
검찰청법 제1조본법은 검찰의 조직을 목적으로 한다.제2조검찰청은 검사의 사무를 통할하는 기관이다. 검찰청은 대검찰청, 고등검찰청과 지방검찰청으로 하고 대법원,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에
bigcase.ai
형사소송법(1954)
https://www.law.go.kr/LSW/lsInfoP.do?docType=JO&lsiSeq=59297&joNo=049100#J491:0
형사소송법 | 국가법령정보센터 | 법령 > 본문
www.law.go.kr
'정치공부 > 논문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본주의형사소송에서 기소법정주의와 기소편의주의의 반동성 (2) | 2025.07.18 |
---|---|
미국·일본·프랑스·독일의 검찰제도 비교 연구 (0) | 2025.07.11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 (3) | 2025.06.30 |
한국 보수주의의 이념적 건축 (3) | 2025.06.30 |